● 휠체어의 켈립(Caleb) 

시범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데 휠체어 탄 아이가 자기도 태권도 배울 수 없겠냐고 물었다. 11살이고 이름은 켈립(Caleb)이었다. 가족끼리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고 한다. 켈립의 아버지도 어떻게 받아 줄 수 없겠냐고 한다.

이런 학생을 지도해 보고 싶긴 했지만 일반 수업시간에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고 나 또한 경험이 없으니 일단 무료로 한 주일에 한 번씩 가르치기로 했다. 막기 지르기 등 상체만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기술들을 가르쳐 주고 숙제를 내주었다. 다음 시간에 점검 받고 잘하면 다음 기술을 가르쳤다. 심사 보는 날 휠체어 탄 아이가 함께 정렬해 있으니까 다들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품새를 하는데 합류 시켰다.

준비 자세에서 왼쪽으로 휠체어를 돌려 막고 지르고 다시 반대로 돌려 막고 지르고 그런 식으로 발차기를 빼고 하는 품새를 마친 후 우렁찬 기합으로 마무리를 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눈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진지함이 배어 나왔다. 타겟을 찰 때도 줄을 섰다가 주먹이나 손 또는 팔꿈치로 치고 빙 돌아 자기 줄에 합류했다.

한번 겨루기와 호신술 심사도 잘 끝냈고 안전벨트를 맨 휠체어가 휘청거릴 정도로 힘을 주어 송판을 깨고 나자 모든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심사가 끝나고 새 벨트를 받고 악수를 하는데 어제까지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자기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불타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내 손을 꽉 부여잡은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저 고맙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어느 날 도장에서 밤샘하는 프로그램에 켈립이 합류를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화장실 사용이 걱정스러웠다. 혼자 변기에서 일을 볼 수 있다는 아버지 말을 듣고 허락을 했다.

피구를 하는데 아이들이 켈립이라고 사정 봐주지 않았다. 내심 뜨끔했다. ‘아니 불쌍하지도 않나? 좀 봐주지.’ 하지만 그건 곧 기우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공을 맞고 나온 뒤 켈립이란 녀석도 인정사정 안 봐주고 공을 던지는데 만만찮은 실력이었다.

잠시 다음을 준비하느라 켈립에게서 눈을 떼게 되었다. 문득 생각이 미처 뒤를 돌아보곤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휠체어는 비어 있고 아이들이 켈립을 땅에 눕혀놓고 힘없이 늘어진 다리를 붙잡고 질질 끌며 이리 저리 뛰고 있지 않은가? 너무 놀라 얼른 말리려고 하는데 땅바닥에 누운 채 끌려가는 녀석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고 끌고 가는 아이들도 못살게 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조용히 그 중 한 사내아이를 불러 물었다. “너희들 뭐 하는 거니?” 행여 야단 맞을까 싶은지 걱정스레 대답을 했다. "우리가 막 뛰고 노는데 휠체어로는 우리처럼 못 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켈립을 도와주는 거예요.“ 가슴이 뭉클했다.

● 휠체어의 제시(Jesse) 

켈립 이야기를 듣고 한 엄마가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이름은 제시. 나이는 열 살이지만 여섯 살 정도였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나온 것이다.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휠체어에서 내려와 보라고 하니까 앉은 자세 그대로 다리와 허리가 90도로 꺾여 펴지지 않은 채 기어 다녀야 했다. 힘도 너무 약했다.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매주 받는 물리치료 외엔 아무런 운동을 해본 적도 없고 받아 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좋은 일 한 번 하자 싶어 또 무료로 한 주에 한 번씩 오라고 했다.

그런데 팔도 반 밖에 안 펴지고 엄지손가락도 잘 굽혀지지 않아 무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부러 큰소리 쳐가면서 터프하게 가르치는 척 했다. 이거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게 아닌데 너는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주면서 말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잘 나오지도 않는 기합소리를 내며 열심히 했다. 엄마의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보람도 있었다.

태권도가 조금이라도 이 아이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엄마 말이 학교(장애인 특수학교)를 다녀오면 아무 것도 안 하던 아이가 열심히 팔을 펴고 주먹을 질러보고 막는 연습도 하며 일주일 내내 태권도 시간을 기다린다고 했다. 태권도 할 땐 내가 봐도 눈이 살아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제시가 조금씩 자세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몸의 한계가 있어 제대로 된 기술을 보이긴 어렵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태권도 수련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다들 심사를 보고 벨트가 올라 갈 때마다 행동이 바뀌고 자신감이 생긴다. 이 아이에게는 심사를 통한 자신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심사 때가 되었다. 켈립 때보다 상황이 어려웠다. 혼자 휠체어의 방향을 바꾸기가 어려울 정도로 팔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외는 없었다. 힘들게 이룬 일 일수록 성취감은 큰 법이다. 한참을 낑낑대며 품새를 끝냈다. 차라리 숨죽이고 봐주는 사람들이 더 힘이 들 정도였다. 겨루기와 호신술은 내가 상대 해주었다.

마지막 격파 순서. 제일 얇은 송판을 깨는데도 한 번에 못 깼다.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팔로 일곱, 여덟 번을 시도해도 안되자 눈물이 글썽이며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도장 한 복판의 휠체어에 앉아 남들은 한 번에 깨는 것을 못하고 있다는 수치심이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다.

관람객들도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하던 것을 멈추게 하고 내가 물었다. “노란 띠를 따고 싶나?” 다 죽어 가는 소리로 “Yes sir.” 한다. “방법은 하나다. 그 송판을 깨라. 난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시키는 거다. 다시 한 번 대답해라. 할 수 있나?” “Yes sir.” “소리가 작다! 할 수 있나?” 내가 버럭 소릴 질렀더니 깜짝 놀라 목소리가 커졌다.

“Yes sir!” 목소리가 커지면 십중팔구는 된다. 자신감이야말로 진정한 내면의 힘이기 때문이다. “격파!” 어금니를 깨물고 눈에 반짝 빛이 났다. 마지막 내리친 손에 송판이 깨졌다. 주위의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쳐주었다. 결국 해내고 나자 그제서야 뭐 별거 아니었다 라는 투로 머쓱하게 웃고 있는 제시 뒤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그 후에는 돌아가며 블랙벨트 학생들에게 제시를 지도하도록 시켰다. 서로 친구를 만들 수도 있고 선배들은 태권도를 배웠으니 좋은 일에 쓸 줄도 알아야 하지 않는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제시를 내가 차타누가의 제일 번화한 백화점 중앙무대에서 열린 Kid Talent Search (어린이 장기 선발대회)에 참가시켰다. 잘난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당당하게 겨뤄 보라고 시킨 것이다. 두 사람이 휠체어 채 들어 무대에 올려주자 평범하지 않은 등장부터 눈길을 끌었고 다 펴지지도 않는 팔로 품새, 호신술, 격파와 쌍절곤 시범까지 보였다.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행운을 얻었다.

이 장면이 그 날 최고의 장면으로 지역 신문에 실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덕분에 일약 스타가 되었다. 엄마가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던지. 사범으로서 태권도를 통해 자신감 넘치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 그 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 수 없다.

태권도. 그것은 내 인생뿐만 아니라 나를 만난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준 좋은 친구다. 난 항상 말한다. 난 태권도를 파는 게 아니라 자신감을 판다고.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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