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그 로이 태권도 시범단 

목사님께서 한 한인 아주머니를 전도하려고 교회 좀 나오시라고 했더니 요즘 블랙벨트 1단을 따고 도장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느라고 바쁘다고 하더란다. 목사님이 잘됐다 싶어 우리 교회에서도 태권도를 가르치니 와서 같이 가르치시면 좋지 않겠느냐며 정중하게 권유.

그랬더니 아주머니 왈, 교회에서 태권도를 하면 얼마나 하겠냐며 언제 자기네 도장 시범단 시범이나 보여주겠노라고 하더란다. 그러라고 목사님이 대답을 하시곤 나보고 언제 그 쪽 사람들 올지도 모르니 알고 있으라고 하시는 게 오면 본때 좀 보여 주라 하시는 것 같았다.

어느 주일 예배 후에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데 아무 예고도 없이 도복을 입은 미국 사람들이 교회 체육관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며 어른들이며 유단자만 30여 명에 그 가족들까지 삼삼오오 짝지어 들어와서 금방 교회 체육관이 가득했다. 그레그 로이라는 사범이 단장이었다. 4단 이라고 했다.

가르치던 것을 마무리하고 아이들에게 유단자들이 시범을 왔으니 잘 보고 배우라 하고 자리에 앉혔다. 난 유단자를 하나도 배출하지 못한 때였다. 최고참이 파란 띠였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시범을 보이는데 품새와 한번 겨루기, 그리고 격파는 송판 한 장씩을 기본 발차기와 손 기술로 깨는 정도였다. 제일 난이도 높은 발차기래야 뛰어 뒤차기로 송판 3장. 자기들끼리 박수를 치고 소리 지르고 잔치를 벌였다.

마지막으로 척 노리스처럼 생긴 사범님께서 등장했다. 다들 긴장했고 나도 그랬다. 한참을 폼을 잡더니 대갈 일성 아~핫! 빡! 손날등 돌려치기로 송판 한 장... 같이 온 시범단과 가족들은 박수를 치며 난리 났다. 난 좀 황당했다.

어쨌건 인사치레로 우리 아이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땐 잘 못 알아들었지만 대략 ‘태권도가 내 인생을 바꾸었다. 태권도는 대단한 무술이다. 될 수 있으면 이런데서 함부로 배우지 말고 도장 와서 제대로 배워라’ 뭐 그런 뜻이었다.

연설만 끝내고 그냥 가려고 하길래 불러 세웠다. “여기 까지 왔는데 준비 한 건 없지만 우리도 뭐라도 보여 드리는 게 답례라 생각한다. 잠깐 시간 내줄 수 있겠는가?“ 나가려던 사람들이 다 자리에 앉았다.

쓰다 남은 송판을 꺼내다 놓고 꼬맹이며 계집애며 아무나 일으켜 세워 격파를 시켰다. 장애물 너머 이단 옆차기, 뛰어 뒤후리기, 뛰어 돌아 돌려차기, 뛰어 벽 밟고 돌려차기 빡빡빡! 이쯤 되니 뭔가 아니다 싶은 얼굴로 바뀌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리 교회에 여자 사범이 시집와 함께 다니고 있었다. 용인대를 나온 국가대표 출신으로 싱가포르 여자대표 팀 코치로도 있었던 실력파다. 조그만 여자가 나와서 한순간에 연결 발차기로 송판들을 빠바박 빡빡! 박살내고 유유히 들어가자 판이 뒤집어 졌다.

다음은 내 차례, 주먹으로 1인치짜리 송판 다섯 장을 뚫었다. 손끝 찌르기, 손날, 손날등 치기로 이어지는 위력 격파 빡빡빡! 보는 앞에서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꺼내들고 사과를 꽂아 들게 하곤 맨발로 뛰어 돌아 차서 박살내 버렸다. 그 쪽 유단자들이 입이 딱 벌어졌다. 우리 파란 띠 여자아이와 같은 반 친구인 유단자가 그 시범단에 있었는데 기가 확 죽었다고 한다. 저도 못하는 격파를 파란 띠가 하고 있으니...

정중히 인사를 했다. “지금은 준비된 것이 없어서 뭐 별로 보여드릴게 없지만 다음에 기회 닿으면 우리도 그 쪽 가서 시범 한 번 했으면 좋겠다.”

그 팀을 끌고 오는데 주력했던 아주머니는 이미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레그 로이 사범은 교회에서 태권도를 한다니까 시범 한 번 보이면 신입관원 꽤나 늘겠다 싶어 온 것 같았다. 그런데 잘 알아보지도 않고 와서 망신만 당했다는 눈치가 역력했다.

사실 나도 한국 사범이 있다는 걸 듣고서도 당당히 시범단을 끌고 온 것에 내심 괘씸했었다. 그리고 태권도 간판을 걸고 저 정도면 저 학생들은 한국 태권도를 뭘로 알까 싶었다. 하지만 뭐 나야 손해 본 것 없으니 그 일은 잊혀졌고 한참 지나 그 도장 구경도 할 겸 찾아갔다.

품위 있는 중년 여성이 블랙벨트를 매고 매니저 격으로 계셨다. 나를 알아보시고는 지난 번 시범 너무 잘 봤다고 반가워 하셨다. 그날 이후 그 도장 유단자들이 벽 밟고 뛰어 차는 거 해본다고 하도 뛰어서 벽에 구멍 날 지경이란다. 사범은 손끝 격파를 해보겠다고 손에 붕대 둘둘 감고 송판을 노려보다가 주위에서 손가락 부러진다고 말리니까 끝내 못하고 포기했다며 주위 학부모들에게 나를 소개하며 칭찬이 대단하다.

마침 그 사범은 수업 중이었는데 나를 보더니 아예 눈길을 피했다. 기다렸다 인사나 하려고 했는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못 본체 서둘러 다음 수업으로 바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 혹시 시비나 걸러 온 것으로 보일 수 있겠구나. 그래서 그냥 뒤에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와 버렸다. 그 사범은 그 사건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는지 시내에서 가끔 나를 보면 멀찍이서 모른 체 피해버린다.

또 한번 배웠다. 겸손해야 한다. 세상천지엔 나보다 상수(上手)가 수도 없이 많이 깔려있지 않은가? 괜히 민망한 꼴이나 당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 다음호에 계속

이정규 사범  wtkd@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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