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파예트에 도장을 열다 

얼마 지나자 청년들이 먼저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열심히 수업을 했다. 도장이 협소해서 여럿이 품새를 하다보면 벽을 차게 되니 이리 저리 물러서며 했다. 비가 오는 날은 지붕마저 샜다. 주저앉는 천장을 받치느라 기둥도 하나 떡 버티고 있었고 카펫 바닥이 흥건히 젖고 양동이를 가져다 놓고 나면 그나마 운동할 공간이 더 작아졌다.

이게 도대체 어느 시대 이야기인가 싶지만 내게 있어선 고작 5년 전 기억이다. 그래도 다들 재미있게 운동을 했다.

처음 등록한 크리스와 제이슨은 체중 감량이 목표라고 했다. 여름엔 더위를 이기며 하는 수련이야말로 원시적 야성을 일깨우며 특히 살빼기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설명을 했다.

그런데 에어컨을 꼭 켜야 되겠냐? 그럼 켜지 말자고 했다. 그렇게 동의를 얻곤 벌겋게 달아 오른 도장에서 여름을 났다. 매일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둘 다 60파운드씩을 뺐다. 둔해 보이던 몸이 맵시가 잡히고 탄력이 생겼다. 대성공이었다.

반년 남짓 지나자 수련생이 40여 명을 넘어섰다. 아침, 저녁으로 남 몰래 청소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니 살 것 같았다.

하루는 긴 머리를 뒤로 따 내리고 콧수염을 기른 삼십대 사내가 가방을 걸러 매고 들어왔다.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자긴 건너 동네 도장 사범이란다. 소문 듣자하니 실력이 괜찮다고 해서 수업 한 번 참가해 보려고 왔단다.

이건 아예 시비조였다. 사전 연락도 없이 도장 문을 밀고 들어오다니. 게다가 우리 도장 청년들이 저 사람이 유명한 월드 챔피언이란다. 내심 긴장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간판 떼기인가? 지면 떠나라 그런 거 말이다. 폼 나는 도복으로 갈아입고 검은 띠를 차고 나온다. 우리 도장엔 있지도 않은 검은 띠가 몸 풀고 있으니 당연 학생들의 시선은 나와 그 사람을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단발로 차는 발차기에 각이 잡혀있었다.

나를 따라 겨루기 발차기를 했다. 물론 평소보다 강도를 높였다. 조금 지나자 헉헉대기 시작하더니 공중에서 여러 번 이어 차는 시범용 발차기에선 그 좋던 각은 어디가고 헤메고 있었다. 이런 발차기는 처음 해봤다며 헐떡거리는 그에게 어디서 월드 챔피언 땄느냐고 물었다. 자기네 협회 주최 세계대회에서 땄단다. 제대로 된 국가대표 끼리 하는 대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엔 월드 챔피언이 이런 식으로 참 많았다.

들어올 땐 뻣뻣했는데 나갈 땐 다음에 또 오겠노라 인사까지 꾸벅하곤 다신 안 나타났다. 도처에 실력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광활한 미국이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들도 많았다. 그 뒤로도 어느 도장 유단자이고 보조 사범이라며 다녀간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두 번 찾아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온 몸으로 가르치는 태권도 

처음 도장을 열자 젊은 청년들이 많이 등록을 했다. 샌드백을 달 형편이 못돼 몸통 타겟을 두 개씩 겹쳐 잡고 발차기를 몸으로 받았다. 막다 밀려 나가 벽에 부딪히고 떨어지기를 하루에도 수 십 번씩 했다. 그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더 세게 차 봐'를 외쳤다. 맷집이 대단하다고 다들 감탄을 했다. 처음 맞는 관원들에게 만만하게 보인다면 앞으로도 가능성 없는 게 아닌가. 오기로 버틴 것이다.

밤마다 약을 발라주는 아내가 보다 못해 꼭 이렇게 해야 되냐고 묻는다. 그 땐 영어도 안되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간 내가 겪은 미국 사람들은 다분히 실전적이었다. 만만히 보이면 사범에게라도 도전을 해온다. 그런 도전의 대상으로 보여선 안되었다. 피멍이라도 들어서 이기면 그나마 본전이지만 지면 여길 떠야 한다. 더욱이 난 갈 곳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나는 나 하나의 개인이 아니었다. 난 이 동네에서 코리아를 대표하고 있었다. 일본이라면 미국 버금가는 선진국으로 생각을 하지만 우리나라는 캄보디아나 베트남 수준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그들이 보는 내가 한국의 전부이지 않는가. 내 실력이 곧 한국의 수준이었다. 못 벌고 배고파도 절대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당당한 코리안으로 살자.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태권도로 국위 선양해야 한다. 민간 외교관! 그것이 또 하나의 나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타겟만 잡아 줄 순 없는 일이다. 겨루기도 같이 해줘야 했다. 이리 저리 피하다가도 한 번씩 받아 찰 땐 눈물 쏙 빠질 정도로 차주었다. 그리고는 아파서 쩔쩔매는 녀석에게 그런다. '야, 내가 살살 찼는데 그 정도면 진짜 차면 죽겠다?' 그러면 입이 딱 벌어진다. 위협으로 아주 쓸모가 있었다.

격투기식으로 붙는다면 이 친구들에게 이길 가망은 희박했다. 그러니 알아서 기술로 눌러야 했다. 날아오는 발을 코끝에 닿을 듯 말 듯 피해준다. 이 친구들은 아직 눈이 숙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을 놓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찬 것 같았는데 자기 발은 빗나갔으니 말이다. 같이 뛰느라 숨이 턱에 차도 체면 때문에 코만 벌름거리며 숨을 삭혀야 했다.

처음 일년 이년은 타겟을 잡다가 잘못 날아오는 주먹이며 발들에 골병이 들 것 같았다. 특히 타겟을 잡은 엄지손가락은 채 낫기도 전에 맞고 또 맞다 보니 눈물이 핑핑 돌고 아파 죽을 지경이었지만 꾹 참았다. 찬 녀석들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면 '이까짓 것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차기나 해!'라고 큰 소릴 쳐야 했다.

● 라파예트 도장 

일년이 지나 도장을 라파예트란 옆 동네로 옮겼다. 너무 좁은데 비까지 새니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그저 넓은 곳을 찾아다니던 중에 맘에 딱 드는 곳을 찾았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건물인데 학부모 중 한 분이 건물주에게 우리 사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데 가진 게 없으니 잘 좀 봐달라고 부탁을 해서 엄청 싸게 자리를 얻었다.

다시 도장이 모습을 갖추고 수업을 하는데 머리를 산발하고 수염을 덥수룩히 기른 녀석 하나가 나타나 창 밖에서 노려본다. 안 그래도 이 동네에 노골적인 텃세가 심하다는 소릴 듣고도 왔는데 초반부터 낌새가 영 안 좋았다. 다음날 또 다음날 어김없이 수업시간이면 창밖에 서서 나를 노려본다. 저 놈 저러다 한 번 들어오겠지 싶었다.

동네 장사에 주먹다짐이 오가면 그것은 망하는 짓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폭력은 안된다. 예의와 수양을 가르친다는 사범이 주먹다짐은 아예 생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 신경이 쓰였다.

드디어 밖에서만 쳐다보던 놈이 날을 잡았는지 도장 안으로 들어왔다. 손엔 긴 장대까지 들고 말이다. 다음 수업을 기다리던 학생들이 그 분위기 안 좋은 녀석 때문인지 기도 못 펴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눈은 위로 치켜뜨고 이소룡 마냥 인사를 한다. 난 이 인사법이 정말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정중히 인사를 받아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정규 사범  dssim22@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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