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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한인 태권도 사범 수기 공모] 좌충우돌 이정규 사범의 미국 정착기 (16)
한복을 입고 태권도를 하고…
가장 한국적일 때 가장 경쟁력이 있다
  • 이정규 사범
  • 승인 2007.04.02 11:11
  • 호수 540
  • 댓글 0

● 대학원 종강 파티 - 아내가 떳다 

아내가 대학원에 입학했다. 남부의 옥스퍼드라고 불리는 150년 전통의, 교정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립대학이었다. 그 대학원에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들어가기도 힘들거니와 학비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그 학비를 댈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아내가 전액장학금을 받고 입학을 했다. 너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막상 다녀보니 공부하기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학문에서 쓰는 영어는 격이 달랐다. 막대한 분량의 책을 읽고 논문을 써야 하는 아내에게 누구의 도움도 없는 학교생활은 힘겹기만 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수업시간 마다 주제 토론을 하는데 영어를 잘 못하니 몇 마디이상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정규 사범 부인 김시현씨가 공중에서 앞차기 3단계로 풍선을 터트리는 모습.

마치 아내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양 자기들끼리 주고받고 결론 내고 끝낸다는 거였다. 그렇게 눈칫밥을 먹으며 때론 울며 힘겹게 한 학기를 마쳤다. 학기를 마치며 종강파티를 하는데 가족 동반이었다. 처음 초대받는 미국인들의 정식 디너 파티였다. 우린 한복을 입고 갔다.

그제야 눈에 뜨이는지 우리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우리가 태권도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지나가는 말로 그럼 시범 좀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O.K! 그러마 하고 당장 가서 차에 실려 있는 송판을 꺼내왔다. 벽난로가 아름답게 장식되고 둥근 탁자들이 놓여있는 파티장에서 나와 아내가 즉석 시범을 보였다.

되도록 아내가 주목받도록 했다. 풍선 세 개를 낮게 잡도록 관객들에게 부탁했다. 치마를 입은 아내가 치마를 양손으로 걷어잡고 기합을 지르며 달려와 떠서 빠바방! 풍선 세 개를 순식간에 터뜨려 버리고 사뿐히 내려앉았다. 다들 놀랬다. 한복을 입은 채 나를 집어던지고 해치우는 날렵한 솜씨며 작은 손, 발에 깨어져 나가는 송판들에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도 않던 작은 동양여자가 대학원생들과 교수님들 앞에서 치마를 바짝 올려붙인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시범이 끝나자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학원 학장님 내외가 오셔서 너무 잘 봤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우리 대학원에 하나뿐인 동양 학생이 이런 실력자인줄 몰랐다며 자기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다른 교수님들이며 학생들도 같이 사진 찍자며 달려들었다. 과외활동으로 클럽을 개설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갑자기 이방인에서 주인공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있다. 아 우리가 한복을 입고 태권도를 하고 가장 한국적일 때 가장 경쟁력이 있구나. 그 뒤로 우린 경기장이나 파티에 갈 땐 되도록 한복을 입는다.

우리가 양복에 넥타이 매고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보다 차라리 영어를 못해도 그게 더 우리를 알리고 우리 입지를 마련하는데 나았다. 그 뒤론 다른 학생들이 아내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었는지 모른다. 논문 작성, 주제토론 뭐든 성심껏 도와주고 아내 역시 학교 활동에 적극 동참하는 등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다음 학기 대학원 행사에는 정식으로 우리 시범단이 초청 받아 가는 일도 생겼다. 덕분에 우리 도장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아내가 미국인들도 들어가기 힘든 이 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놀랐다. 졸업 할 때까지 태권도 덕에 받은 도움은 말로 다 못할 정도였다. 학생들이나 교수님들이 아내를 특별한 친구로 사랑해주어 고마움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내가 박사과정에 지원했을 때 인터뷰를 하시던 교수님이 이렇게 추천서를 잘 받아온 사람은 본적이 없다며 정말 그런 사람이냐고 묻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그 날 보인 즉석 태권도 시범 때문이었기에 아내는 태권도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태권도 덕분에 아내가 떴다.

● 인생 종착역 - 양로원 위문 공연

태권도 시범 덕에 참 여러 곳을 다녔다. 애틀랜타 조지아 공대에서 열린 청소년 집회에서는 약 2천명이 넘는 관객 앞에 무대에 섰고 서쪽으로는 캘리포니아, 북으로는 캐나다 바로 밑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크고 작은 시범을 다녔다.

시범 덕에 우리 학생들이 세상 구경 제법 많이 한 셈이다. 2006년 11월에는 한국탐방도 마쳤다. 우리가 실력이 좋아서 다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세상과 이 시골동네 아이들을 연결시켜 주고 싶기 때문에 내가 일을 만든다.

하지만 가장 멀리 세상의 끝으로 간 시범은 다름 아닌 동네 양로원 시범이었다. 난 양로원 시범을 자주 간다. 매 학기마다 시범단을 재구성하는데 시범단이 구성되면 제일 먼저 가는 곳도 양로원이다. 단원들에게 큰 무대에 서기전에 작은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겸손함을 가르칠 수 있고 태권도로 나눔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양로원에 가보면 하루 종일 누군가를 기다리며 휠체어에 앉아 창가에 붙어사는 노인들을 본다. 대부분 휠체어에 산소 호흡기를 매고 있거나 침대 채 밀고 와서 누워서 시범을 본다. 손주 같은 아이들이며 젊은이들이 재미있게 시범을 하면 다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신다. 미국은 연세가 들면 가족들이 있어도 양로원으로 보내는 것이 문화다.

처음엔 안 그랬겠지만 젊은 자손들은 세상사는 게 바빠 오던 발걸음이 뜸해진다. 명절 때나 한번 찾아온다. 그나마 일이 년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분들도 부지기수다. 자식들이 다른 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유니폼 입은 간호사들만 왔다 갔다 하고 병실 같은 방에 누워 일 년만 있으면 그리움에 지쳐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한단다.

사람 구경하기 힘든 이곳은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사는 희망이 사라진 곳이었다. 그러니 누구고 사람만 나타나면 좋아하신다. 싸구려 양로원은 심하게 냄새가 나기도 한다. 처음 간 사람은 숨쉬기도 힘들다.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이런 곳을 가기 꺼려한다. 하지만 이곳이야말로 인생을 바로 볼 수 있는 산교육의 장이다.

시범 후엔 아이들에게 일일이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잡아 드리고 재미있으셨냐고 묻고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그러면 노인들이 울며 감동을 받는다. 귀여운 아이들이 와서 핏기마저 가셔 마른손을 잡아주면 얼마나 행복해 하시는지 모른다. 사람이란 나이와 관계없이 사랑을 받아야 살 맛 나는 존재인가 보다.

어떤 분은 침대에 누운 채 말도 못해 글썽이는 눈으로만 고맙다는 표현을 하신다. 손이 차갑기 이를 데 없다. 생명의 온기가 가셔 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꽉 잡은 손을 못 놓고 꼭 다시 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하지만 다시 뵐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분들이 기다려주질 않기 때문이다. 창가에 매달린 노인들을 뒤로하고 손을 흔들며 양로원을 나서는 아이들도 말로 못할 무언가를 느낀다. 인생의 종착역 양로원. 그곳이야말로 가깝고도 가장 먼 곳이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규 사범  dssim22@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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