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인촌 벽돌 격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밤엔 청소를 하고 낮에는 그로서리(식품점)에서 일을 했다. 한국의 슈퍼마켓과 비슷하지만 가진 것 없고 못 배운 흑인들이 몰려 사는 빈민촌에서 언제 있을지 모를 총격전을 무릅쓴다는 것이 다르다.

가끔 권총강도의 총격에 사망하는 한인들의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전쟁터 보다 험한 동네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일하던 가게도 벽이며 천장에 총알구멍이 뚫려 있고 연례행사로 권총강도가 들었다. 가게 앞에서 총격전도 벌어졌다.

달리는 차를 향해 마구 총질이다. 경찰도 안 온다. 총 쏜 녀석한테 물으니 마약만 받아 채고 돈 안내고 도망가서 그랬단다. 이 동네에선 마약 딜러가 되어 주머니에 현금뭉치 말아 들고 다니는 게 청소년들의 꿈이다.

다들 작은 일에도 욕을 하며 삿대질을 한다. 술에 절고 마약에 절고, 제정신 갖고 사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후미진 동네에 가로등마저 어둡고 가게 앞에는 때에 찌든 옷을 입은 흑인들이 밤이고 낮이고 싸우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처음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가게에 오자마자 시달렸다. 많은 손님들이 물건값을 제멋대로 내놓는다. 뭐라고 하면 당장 가운데 손가락이 올라온다. 그리곤 피치 높은 짧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처음엔 괜찮았지만 점차 욕으로 들리기 시작해서 참기 어려웠다.

돈 없으니 외상이다. 물건을 훔치다 걸리면 아직 가지고 나간 게 아니지 않느냐며 큰소리다. 훔친 물건을 밟아 터뜨리고 가기도 한다. 술을 상자 채 들고 뛰는 놈 잡으려 들면 칼을 뽑아들거나 주머니에 불룩한 권총을 두드리며 너 하나 죽여도 아무도 모른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어쩌다 하나 잡으면 주위 녀석들이 더 난리를 친다.

하루종일 죽치고 시비 거는 녀석들 가운데 대장 격인 모리스라는 친구가 있었다. 거구였다. 가방 끈은 짧은 게 분명한데 말은 청산유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욕을 하며 달려든다. ‘너 같은 동양 놈이 뭐라는 거냐. 너 오늘밤에 죽는다!’ 손으로 권총 모양을 해서 내 머리에 대고 한 방씩 날린다. 피융~! 이거 당해 보면 무지하게 기분 나쁘다.

시간이 좀 지나자 내가 태권도 사범이라는 게 소문이 났다. 하지만 되레 놀림감이 되었다. ‘니 까짓 게 가라테를 하면 어쩔 건데?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이...’

당하다 당하다 급기야 폭발할 지경이었다. 죽든 살든 결단을 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모리스는 왼 다리를 절었다. 그게 약점이다 싶어 왼다리를 돌려 차고 자빠지면 어떻게 해보자는 게 내 작전이었다. 아무리 거구지만 나 역시 돌려차기로 야구배트를 부러뜨리는 놈 아닌가. 그런데 막 거사를 벌이려는 참에 술을 마시며 다리를 걷어올리는데 보니 왼쪽 다리가 쇠파이프로 되어 있었다.

윽~ 작전 미스다. 아무리 화가 나도 다리 없는 녀석 의족을 걷어찬다는 것은 비겁했다. 나중에 들으니 모리스도 한때는 잘나가던 마약 판매원이었는데 누군가의 총에 맞아 무릎아래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단다. 그리고는 인생이 구겨진채 이 동네에 처박혀 악만 남은 상태였다.

그 날도 모리스와 일당들이 온 종일 나를 상대로 온갖 협잡을 하고 있었다. 참다못해 내가 소릴 질렀다. “야! 너희들 다 따라와!” 요 쪼그만 게 오늘 왜 이렇게 뻣뻣이 구나? 가소롭다는 식으로 따라 나왔다. 공사중인 담장 옆에 비 맞고 얼어붙은 빨간 벽돌들이 널려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주위를 살폈다. 마침 단전 높이로 쇠말뚝이 서있었다. 그 위에 올려놓고 짧게 기합을 넣고 죽을힘을 다해 손날로 내리쳤다.

“아~ 핫!” “뻑!” 소리를 내며 벽돌이 깨져 나갔다. 그냥 두 쪽으로만 깨진 게 아니라 부서진 반쪽이 꽁꽁 언 콘크리트 바닥에 맞고 다시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돌아서며 악을 썼다. “야~! 다 덤벼!” 모리스와 일당들이 입을 딱 벌리고 움찔 물러섰다.

“마스터 리! (Master Lee!)” 그것이 모리스가 처음 나를 높여 부른 말이었다. 여지껏은 이 새끼, 저 새끼가 내 이름이었다. 말투가 들떠 있었다. “마스터 리, 손 괜찮냐?” “농담 하냐? 물론 괜찮지!” 모리스가 손을 좀 만져봐도 되냐고 물었다. 손이 벌겋고 후끈거렸다. 부서진 반쪽과 깨어진 파편을 서로 한쪽씩 갖겠다고 달려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보여주며 난리가 났다.

그 다음 날 부턴 일할 시간이 되어 가면 가게 앞에 죽치고 앉아 있던 모리스가 벌떡 일어나서 반갑게 맞아준다. 오늘은 별일 없었다. 몇 놈이 시끄럽게 굴길래 내가 잘 타일러서 보냈다. 고맙다. 모리스. 뭘 친구끼리. 이렇게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김없이 누군가 또 시비를 건다. 모자란 돈을 계산대에 던져 놓고 꼬나보며 큰소릴 친다. “이거 밖에 없어!” “그러지 말고 더 내라 안 그러면 나도 물건 못 주지.” 웃으며 얘기한다. “없댔잖아 죽고 싶어? 여기가 어디라고 동양 놈이!” 당장 멱살을 잡을 분위기다.

그러면 어느새 바깥에 서있던 모리스가 쫓아 들어온다. 뒤통수 한방 빡!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얘가 누군지 알아? 맨손으로 벽돌 깨는 애야. 니 머리통 벽돌보다 세?” 맞은 녀석 “에이, 쟤가 무슨...” 다시 한방 빡! “이게! 내가 봤다니까!” ‘속시원하다. 짜식...’ 그러면 맞은 놈은 남은 돈을 내고 간다.

그 일 이후 나는 모리스를 인간적으로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녀석도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사는 거지 누군들 행복하고 편안한 생활 안 하고 싶겠는가. 어쩐지 같은 유색인종으로 친밀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 주방장 스캇과 샌드위치 

닭을 쳐서 튀김을 하던 주방장 스캇이란 녀석과 싸움이 붙었다. 말이 주방장이지 요리라할 만한 것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튀김가루를 입혀 기름에 넣었다 빼면 그만인 요리였다. 그런데 매번 튀긴 통닭을 잔뜩 몰래 싸주고 1, 2불씩 뒤로 받아 챙겼다.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나중엔 화가 나서 당장 그만둬라 그랬더니 적반하장이었다.

“주인도 아닌 게 왜 난리냐? 죽고 싶어? 죽여줄까? 니가 가라테 좀 한다고 까불어? 너 이리와 토막을 내 줄 테니까!” 스캇이 닭치는 칼을 들고 삿대질이다.

“저 새끼가, 가라테가 아니라 태권도라니까!”

수양이 덜 돼 먹으면 황천 갈 일을 자초한다. 괜한 싸움에 너무 오버하고 말았다.
“너 칼 들었다고 내가 겁낼 줄 알아? O. K! 너 칼 들고 덤벼!” 주방 앞을 막아섰다.
“니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내가 칼 없인 너 하나 못 잡을 것 같애?”
“웃기지마 난 태권도 마스터야. 주먹으론 넌 내 상대가 안돼! 그냥 그 칼 들고 나와!”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이 밖에다 싸움 났다고 소릴 지르니 우루루 관객들이 밀려 들어왔다. 드디어 소문으로 듣던 저 동양 놈 실력 보게 되었구나...

스캇도 몸이 다부진 게 힘이 장사였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펀치 한방이면 황천길을 헤맬지도 모를 판이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너 진짜 토막 난다!” 스캇 눈에 독기가 서리고 목에 핏대가 섰다.
가진 거 없는 놈은 남는 게 괜한 객기뿐인가 보다. 내가 그랬다. 에라 될 대로 돼라.

▷ 다음호에서 계속

이정규 사범  wtkd@paran.com

<저작권자 © 태권도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정규 사범
• wtkd@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