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브리나와 손끝 격파

아내가 다니던 대학에 태권도 클럽이 있었다. 학생들끼리 자연스럽게 구성한 클럽이었고 주장은 4학년 여학생인 사브리나로 빌 클린턴 전대통령을 지도했다해서 유명해진 고(故)이행웅 사범님이 주도한 ATA 1단이었다.

자원봉사 차원으로 일 주일에 한 번씩 가서 지도해주었다. 내가 가니 다들 무척 좋아하며 잘 따랐다. 좀 친해지자 단원들이 틈만 나면 우리 집으로 몰려오곤 했다. 몇 달 지나자 시범을 하겠단다. 그런데 송판은 어디서 구하냐 길래 건축자재상에 가서 1인치 두께 널빤지를 골라 알맞게 잘라 오면 된다고 했다. 알았으니 송판은 자기들이 준비한다고 했다.

이정규 사범의 Lee's TaeKwonDo 도장의 수련생 모습.

그런데 막상 시범 날 가보니 굵직한 옹이가 가운데 여러 개씩 박힌 송판을 그것도 큼직하니 정사각형으로 잘라 온 것이다. 무지하게 싸서 사왔단다. 그런 것들은 못도 안 들어가기 때문에 건축자재로도 쓸모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실수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관객이 초등학생들인지라 그것도 신난다고 박수 치며 좋아하고 있긴 한데 나는 창피했다.

사실 난 이 팀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도와 달라고 해서 없는 시간 내서 가보니 실력들이 형편무인지경이었다. 게다가 주장인 사브리나는 매주 2시간씩 차를 몰고 컨트리 뮤직의 본고장인 내쉬빌(Nashville)까지 가서 주말 사범을 한단다. 그래선지 자부심이 지나칠 정도였다. 완전 군기 반장이었다. 말발로는 관장님(?) 수준이었다.

나를 불러놓고 보니 팀원들이 나를 따르자 은근히 당치않은 경쟁심까지 보이던 녀석이었다. 자기가 안되니 한번은 자기 도장 사범이라고 2단 짜리 녀석을 불러들여 유치하게스리 실력대결까지 시키던 놈이 아니던가. 그 녀석도 체면만 구기고 갔지만...

그런 녀석이 오늘은 앞차기, 뒤차기 격파를 제대로 못해서 연신 헤매고 있었다.

시범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복도에다 학생들을 줄지어 앉히고 한 시범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좌, 우 벽을 타고 뛰어 차는 발차기 격파를 끝냈더니 아이들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한다. “어떻게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타고 다닐 수 있어요?” 우리야 별 것 아니지만 어린 학생들 눈에야 오죽 신기했을까.

발차기는 그럭저럭 끝내고 손끝 격파. 손끝으로 송판을 조준하고 보니 하필 가운데 옹이가 딱 박힌 놈을. ‘아~ 눈치 없는 것들. 좀 보고 고르지...’ 손끝에 미칠 고난을 생각하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올망졸망한 수 백 개의 작은 눈들하며 구석에서 나를 째려보는 사브리나의 시선까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참을 밀고 들어가고 나서야 딱!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끝 격파는 ‘저거 아플 텐데...’ 하는 느낌이 관객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이 묘미이다. 손을 불끈 감아쥐고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움켜쥔 주먹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쯤되자 사브리나도 이젠 완전 항복이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악수를 청한다. 손을 보여주었다. 손바닥이 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자 기겁을 했다.

웃으면서 한마디 해줬다. “Don't try at home!(따라하지 마!)" 사실 그건 해 볼 테면 해보라는 위협이었다.

헤어지고 돌아오는데 차 시동을 왼손으로 걸어야 했다. 겨우 한 손으로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물었다. “시범은 어땠어?” “잘했어. 나 대접에 얼음물 좀 떠 줘.”

집사람은 내가 마시려는 줄 알고 대접에 얼음물을 떠왔다. 손을 대접에 담갔다. 금세 대접에 시뻘겋게 핏물이 고이자 난리가 났다. “무슨 일이야? 손가락 부러진 거 아냐? 내가 그거 하지 말랬지? 왜 자꾸 사서 고생이야? 응? 사람들은 그거 얼마나 힘든지 봐도 모르잖아?” 괜찮다는 데도 손을 닦아주고 약을 발라주며 운다.

나도 사브리나처럼 영어 잘해서 말로 한 몫 할 수 있으면 이런 짓 좀 덜 할텐데 싶었다. 아~ 영어는 언제나 되는 걸까?

● 비 새는 치카마우가 도장 

한국은 도장을 차리기 위해 갖추어야할 자격과 조건이 많고 까다롭다. 하지만 여기선 시청에 가서 돈 내고 비즈니스 라이센스를 받아 가르치면 그만이다. 지도자 개인에 대한 자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몇 단인지. 태권도 지도자 자격증이 있는지, 생활체육 지도자 자격은 있는지 이런 것은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다 보니 더러는 황당한 경우도 많다. 수련생 중에 좀 배우다가 재미도 있고 할 수 있겠다 싶으면 바로 건너편에 도장을 차리기도 한다. 수북히 트로피 쌓아놓고 도장을 연다. 제 실력만큼 가르치고 돈을 받겠다니 할 말은 없다.

영주권이 나오길 오늘 내일 하며 기다리는 시간에 차라리 미국식 태권도를 배워야겠다고 맘먹고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아칸소주 리틀락에 있는 ATA (America Taekwondo Association) 본부를 찾아갔다.

ATA에 가입해서 사범교육을 받으면 미국식 도장 경영에 무조건 성공한다는 광고성 소문을 들었었다. 귀가 번뜩 뜨였다. 태권도야 배워 봤지만 어디 비즈니스를 배워 본적이 있는가? 도장을 차리기 위해 고심은 했으나 미국에서는 어떤 법적 절차나 과정이 필요한지 선배도 없는 나로선 도통 알 수 가 없었기에 너무 불안했었다.

그런데 가보니 내 상상이 지나쳤던 것 같았다. 영 듣던 얘기만 못했다. 게다가 사범교육에 교육비를 거론하는데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런 돈이 있다면 혼자라도 도장 차리겠다 싶었다. 여러 가지로 내 상황과 맞질 않았다.

“지금 다시 청소아르바이트로 돌아간다면 아마 평생 태권도를 못할지도 몰라요. 그간 몇 년을 하루도 못 쉬었으니 당분간 쉬면서 도장 차릴 준비를 해봐요.” 아내가 청소로 돌아가려는 나를 말렸다. 그렇게 석 달을 놀았다. 이리 저리 다니며 도장 자리를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자리도 없었고 세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내가 사는 차타누가에는 이미 한국 사범님이 한 분 계셨다. 행여라도 서로 얼굴 붉힐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멀리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수입이 없으니 얼마 안 남은 생활비가 자꾸 깍여 나갔고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내가 당분간만이라도 청소를 해야겠다 이대로 굶을 수는 없지 않겠냐고 해도 아내는 단호했다.

태권도를 해야 할 사람이 왜 자꾸 다른 곳을 기웃 거리냐는 거다. 어차피 치뤄야 할 홍역이라면 지금 치루자는 것이었다.

낮에는 이리 저리 다녀보고 밤엔 가르쳐야할 기술들이며 지도 방법 훈련 방법들을 조목조목 커리큘럼으로 만들어 갔다. 이 기간이 미국 생활 중 가장 길고 어두운 터널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남편. 몇 년을 고생해서 모아 온 아내의 유학자금을 생활비로 갖다 써야 하는 한심한 남편...

어떻게든 살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져먹지만 일어서기가 너무도 힘겨웠다.

마침내 기다렸던 영주권이 나오고 나서 월세 300불 짜리 허물어진 차고를 내가 고쳐 쓴다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첫 도장을 연 치카마우가(Chickamauga)는 남북 전쟁의 치열한 격전지며 남부군의 사령부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곳이다. 대포며 기념비로 가득한 광활한 들판에 단풍이 들고 뉘엿뉘엿 해가 지면 한 폭의 그림으로 변한다. 역사 빼면 아무 것도 없는 작은 시골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 싸구려 카펫 깔고 도장이라고 간판 걸었으니 오다가다 들여다 볼 뿐 처음엔 누가 등록하려 하지 않았다. 아마 경기장 매트를 깐다면 60장 정도 깔릴 것 같았다. 아내를 수련생 삼아 둘이 운동을 시작했다. 아내는 아직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도 생활비는 청소로 벌어야 했다.

아침 일찍 아내를 학교에 떨구어 주고 다른 곳에 가서 청소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시간 맞춰 수업이 끝난 아내를 데리고 부랴부랴 도장으로 나왔다. 유지비를 아끼느라 에어컨도 못 틀고 점심도 날 식빵에 우유 찍어 먹고 때우기가 일 쑤였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규 사범  dssim22@paran.com

<저작권자 © 태권도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정규 사범
• dssim22@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