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가 끝나면 합격 발표를 바로 하고 벨트를 수여한다. 내가 블랙벨트를 수여할 자격 있는 사범이라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서다. 심사를 통과하고 나면 그 날 블랙벨트를 맬 수 있기 때문에 힘을 다해 준비들을 하게 된다.

블랙벨트 수여가 끝나면 다례(茶禮)를 행한다. 성찬식 같은 것이다. 정갈한 전통국악 연주를 배경으로 도자기로 된 찻잔이며 찻상을 차려놓고 한복을 입은 내가 앉는다. 블랙벨트를 맨 학생들이 한국식 큰절을 올리고 내가 부어주는 잔을 마시고 내게 잔을 돌린다. 내가 받아 마신다. 그러곤 다시 큰절을 한다. 나도 정중히 고개를 숙여 답례 해 준다.

다음으로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를 앞에 모셔 앉혀놓고 다시 절을 하고 잔을 바치게 한다. 자녀들이 깊이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리고 두 손으로 가지런히 바치는 찻잔을 받으며 눈물을 보이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었다. 이제껏 보살펴주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며 더 좋은 자녀가 되겠다는 약속이라고 내가 설명을 한다. 이 순간 다시 한 번 부모와 자녀 사이가 끈끈한 정으로 이어진다.

모든 순서가 끝나면 가족들이 준비해온 음식들을 나누어 먹는다. 심사를 긴 시간에 걸쳐 참을성 있게 보아주고 격려해 준 하객들에 대한 대접이다. 쿠키며 케이크, 그밖에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들을 펼쳐 놓으면 어느 파티 못지않다. 심사 도중 실수한 일, 긴장했던 일들, 벌겋게 부어오른 손을 보여주며 태권도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심사에 대한 여운이 생생히 할 때 서로 칭찬도 해주고 축하도 해주며 같이 사진도 찍는 이런 시간이 행복하고 좋은 추억이 된다. 우리 도장 블랙벨트 심사는 이렇게 심사자가 그날의 주인공이 되도록 작은 축제처럼 꾸며 놓았다.

심사 후 다음 도장에 오는 날이면 도장 입구 쪽 벽면에 있는 Black Belt Hall of Fame(블랙벨트 명예의 전당)에 유단자 도복에 블랙벨트를 맨 사진을 걸어 준다. 새로이 우리 도장 블랙벨트 클럽 멤버가 된 것이다. 블랙벨트, 그것은 자기와의 길고 긴 싸움에서 정직한 노력으로 승리한 이들만이 받을 수 있는 훈장이다.

● 영어가 짧으면 태권도가 괴롭다 - 지랄 발작 차기 

영어는 짧고 가르치기는 해야겠고, 급한 대로 한국말도 튀어나오게 된다. 그래도 눈치껏 따라 해주는 학생들이 너무 고맙다.

태권도라는 것은 지도자의 동작을 보고 반복해서 따라하며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그 마음이 서로 닿고 기가 통하고 나면 말은 덤으로 오가는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꼭 미사여구와 수식어를 갖다 붙인 유창한 말이 아니어도 태권도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있게 된다.

가위를 의미하는 단어는 Scissors이다. 그러니 가위차기는 Scissors kick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발음이 쉽지 않다. 내가 가위차기를 가르치는 데 다들 엉망이었다. 나야 게걸음을 걸어도 자식만큼은 똑바로 걸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설명을 했다. “가위 알지? 가위? 그것처럼 쫙 뻗어 차면 돼.” 그랬더니 “Yes sir!” 대답은 우렁차고 일사불란했다. 그런데 실제 자세는 엉망이었다. 발의 모양이 각각이어서 산만했고 아무리 연습을 시켜도 이 동작만큼은 깔끔하게 바로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가르쳤다.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묻는다. 왜 발차기 이름이 이렇냐고? “뭐가 어때서? 가위차기.” 그랬더니 손가락으로 종이를 싹뚝싹뚝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혹시 가위를 말하는 거냐는 거다.

“그렇다고 했잖아 가위!” 그랬더니 배꼽을 잡고 웃는다. 몇 년째 내가 발음한 것은 지랄, 발작이라는 의미의 Seizure 라는 거다. 아차 싶었다. 그래서 가위차기가 아주 발작 수준에 가까웠었나 보다. 나로선 아무리 듣고 따라 해도 그 말이 그 말 같았다. <scissor와 seizure는 발음기호상으로 미세한 차이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외국인이 이를 듣고 구별하여 남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서로 다르게 발음하기는 아주 어렵다.>

그것 외에도 내 발음이나 어법이 말이 안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아무도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늦게 틀린 표현을 했음에도 왜 Yes sir 하고 대답했냐고 물으니 원래 사범님 말에는 무조건 “Yes sir!” 해야 되는 줄 알고 묻기도 겁났단다.

이제 국기원이나 태권도 학과에 해외지도자 양성 전문 과정을 두고 언어 별로 태권도 명령어, 지도용어, 도장 내 회화, 상담 등의 언어 과정과 현지 문화 등을 교육하는 부서를 두면 어떨까? 다른 방법으로 해외지도자 양성 강좌를 담당하는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해당국가 현지사범들을 연사로 초빙 실시간 인터넷 초청 강연이나 대화 등을 시도해 국내와 해외를 잇는다면 겪지 않아도 되는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 체조 교실 

인종이 다르다는 것은 내겐 신체적으로 따라갈 수 없는 장벽이었다. 점프해서 하는 동작들은 흑인들이 타고났다. 백인들은 그 보단 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 보단 훨씬 낫다. 체공시간이 길어 뛰어 차는 동작들이 여유 있게 나온다. 다리가 길어 폼도 좋다.

인터넷에서 체조기술을 응용한 현란한 시범 기술들이 나오는 걸 보고 제자들이 묻는데 나만 뒷짐 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남몰래 체조 교실을 찾아갔다. 투자라 생각하고 비싼 개인교습을 받았다. 배운 것을 도장에 와서 혼자 연습한다고 매트 깔아 놓고 돌다가 거꾸로 쳐 박히기도 여러 번 했다. 목이 꺾여 몸이 마비되는 게 이래서 그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시범을 몇 번 보이고 나니 다른 학생들은 금새 시범에 응용될 동작들을 쉽게 따라 배웠다. 나도 요령을 아니 이젠 옆에서 보조만 해주면서 가르칠 수 있다. 지금 와선 다들 나는 나면서부터 이런 동작들을 했는 줄 안다. 그저 미국서 배웠다는 말만 하지 않았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규 사범  dssim22@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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