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진흥재단은 국기원과 협력하여 해외에 나가 있는 사범들의 수기를 공모하여 우수한 작품들을 골라 시상했다.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모집했는데 당초의 예상과 달리 무려 70명의 사범들이 수기를 내 주었다. 이 가운데 14편이 뽑혀 등급별로 상이 주어졌다. 이들의 작품은 재단에 의해 두 권의 책이 되어 널리 소개될 것이다.

입상권에 들지 못한 작품들 중에도 아주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우수작들이 더러 있다. 따라서 본지는 이들 작품들을 형편이 되는대로 소개할 계획이다. 그 첫 대상으로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정규 사범의 수기를 골랐다.

재미로만 따진다면 이사범의 작품이 톱 클라스에 속했다. 다소 젊은이 취향이긴 하지만 문장도 깔끔하고 내용이 알찼다. 그의 작품이 아쉽게도 제외된 것은 다른 사범들에 비해 경력이 짧아 사회 기여도나 우리 문화의 소개 등 공적인 면에서 조금 밀렸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긴 분량이지만 가급적 전재해 볼 예정이다.<편집자 주>

이정규 사범과 부인 김시현 씨.

● 해외 태권도 사범 우리는 누구인가?

태권도 경기장에서 수많은 미국인들과 함께 가슴에 손을 얹고 태극기를 향해 반주도 없는 애국가를 부르다 보면 가슴 속 깊은 곳에 작은 샘물처럼 가라 앉아 있던 설움과 내 사랑 대한민국이 울컥 가슴에 사무친다.

우린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태권도 사범들이다. 단순히 무도를 가르치는 지도자임을 떠나 한국의 얼을 세계에 심는 당당한 외교관들이다.

오늘의 세계 태권도는 한국 내에서 땀을 흘려 지도하시는 사범님들과 먼 나라 거리 모퉁이마다 땀을 흘려 씨앗처럼 한국을 심은 사범님들의 합작품 이라고 믿는다.

낯설고 물 설은 이국 생활이 쉽지 않았음은 누구나 공감한다. 이젠 웃으며 이야기하는 추억이 되었지만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 국제사범 1호로 70년대 초에 도미하신 서영선 관장님이 계신다. 인자하신 인품 덕에 친구와 제자가 많으신 분이시다. 65세가 넘으신 연세에도 매일 도복을 입으시고 손수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이 분을 통해 지난 경험담이며 태권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걸 좋아한다. 처음엔 식당에서 다른 것을 시킬 줄 몰라 핫도그로만 끼니를 때웠다고 하셨다. 하도 먹어 모래알 같이 씹히는 핫도그를 씹고 또 씹으면서도 거구의 제자들 앞에서 불호령을 하며 함께 뛰며 뿌리를 내리셨다고 했다.

쉬는 날이면 차를 몰고 멀리 강변에 나가 코펠에 끓인 된장국을 떠먹으며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가슴 아픈 감상을 일으키게 한다. 나도 조금은 맛본 일이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만만히 보고 왔던 미국이었는데 와 보니 사정이 그게 아니었다고 하셨다. 도리어 남이 안보는 새벽과 밤에 비오듯 땀을 흘리며 남모르게 자기 훈련을 해야 했었다고 한다. 맨주먹, 맨발로 돌을 깨는 위용을 보여가며 일구어 놓은 오늘이었다.

오늘의 미국 태권도를 닦아 놓으신 선배 사범님들의 실력의 근원은 신속, 정확, 일격일파를 슬로건으로 수백 만 번에 이르는 반복과 단련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근육질의 거구들이 하루아침에 따라 올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었다.

섬��하리만치 단단한 손과 발에 추풍낙엽처럼 깨져 날아가는 묵직한 송판들이며 벽돌조각들... 칼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예리하게 맺고 끊는 동작들. 체격과 상관없이 누구의 도전이던 O.K! 를 외치던 당당함. 모든 것들이 오늘의 미국 태권도를 있게 한 밑거름이었다.

● 왜 태권도인가? 

태권도가 미국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는 무술인 이유를 나에게 들라면 실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성과를 제시하는 수련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태권도는 발을 공격의 주체로 삼는 무도이다. 침대, 소파, 운전으로 이어지는 앉은뱅이 문화로 하체가 약해진 미국인들에게 하체의 힘을 기르고 균형을 찾게 하는데 가장 실질적인 수련체계를 가진 무도이다.

타겟을 찰 때의 가슴 후련한 맛이며 마음껏 질러 보는 기합. 호흡과 정신을 가다듬어 깨는 격파의 쾌감은 스트레스를 날려보내기에 충분하다. 침대에서 내려와 침대 위에 오를 때까지 벗지 않는 신발문화로 꽉 막힌 발의 기운을 맨발로 뛰고 차서 풀어 주니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발차기 기술은 인체의 중추인 척추와 골반을 많이 사용하여 자연 유연하고 강하게 만들어 준다. 실제로 발차기로 타겟을 차는 수련을 하고 나면 몸이 다른 어떤 운동을 한 후도 맛 볼 수 없는 시원함을 느낀다.

다리와 고관절의 운동 각도가 다른 어떤 운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큰 각도로 움직이기에 이때 얻어지는 스트레칭 효과로 골반이 제대로 풀린 것이다. 그러니 일반 휘트니스 센터에서 단련을 하던 사람들도 함께 기합을 지르며 땀흘려 타겟을 차고 나면 그 상쾌한 맛에 감탄을 한다.

또한 개인주의와 무절제한 생활에서 해이해져 버린 심신을 절도 넘치는 단체수련으로의 극복하고 절제된 생활태도를 기른다.

힘겨운 수련 끝에 받는 블랙벨트와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은 태권도를 배우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닌가 싶다.

숨을 고르고 가다듬어 마음을 맑게 씻어내는 태권도 수련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갖는 짧은 휴식이다. 몸과 마음을 신선하게 재충전하는 움직이는 명상 수행이다. 새롭게 자신의 생활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진다. 내가 지도한 수련생들이 태권도를 접해보고 나서 증언하는 내용들이다. 나 또한 이런 맛에 사로 잡혀 태권도 수련을 내 삶의 천직으로 즐기며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 영어가 문제였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학창시절 영어와 나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쌓여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교양 필수로 영어를 다른 학과랑 공동 수강하고 있었다.

중간고사를 보는데 주관식이 나왔다. 뭔가를 설명한 글인데 답을 한 단어로만 쓰면 된단다. 한문 섞인 신문을 읽듯이 아는 단어들의 조합을 만들어 보았다. desert(사막) + trade(무역) + animal(동물) = ?, 이런 방정식이 나왔다. 직감적으로 ‘낙타’를 떠올렸다. 그래서 영어로 ‘낙타’라고 자신 있게 쓰고 나왔다.

친구들에게 확인해 보았다. 아까 그거 낙타 맞지? 다들 맞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대견스럽던지. 얼마 만에 맞춘 주관식 문제인가? 다음 시간이 돌아왔다. 교수님께서 점잖게 물으셨다.

“지난 시험 주관식 문제에 답 ‘낙타’라고 쓴 사람 손 좀 들어보세요.“
기쁘게 손을 들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아니다 싶었다. 나말고 아무도 손을 안 들었기 때문이다. 가슴 철렁한 불길한 예감...... 주관식 문제를 나만 맞추었단 말인가?

불가능한 상황설정이었다. “자네 낙타 철자가 ‘N-a-c-k-t-a'라고 생각하나?”

강의실이 뒤집어 졌다. 그럼 철자가 틀렸나? “그럼 K가 빠져야 되는 건가요? 그럼 넥타가 되는데.” 이번에도 나만 빼고 다들 뒤집어 지게 웃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았다. 낙타는 우리말이고 영어로는 카멜(Camel)이라는 것을......

▷ 다음호에 계속

이정규 사범  wtkd@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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