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태권도협회(KTA)가 소청제도를 개선, 잘못된 심판 판정을 바로잡겠다고 공언한 이후 실제로 소청이 제기된 경기의 승패를 번복하는 초강수를 두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판정에 대한 의혹과 시비를 불식시켜 공정한 판정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집행부의 강력한 의지가 구체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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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 경남 삼천포체육관에서 열린 제3회 3.15기념 전국태권도대회에서 최정호 심판위원장(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심판들에게 심판활동에 대해 당부하고 있다. |
KTA는 지난 14일 경남 사천 삼천포체육관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 파견 선수선발 1차 평가전에서 심판 판정에 문제가 있다며 각 팀이 제기한 5건의 소청 중 2건에 대해 판정을 번복해 승패가 바뀌었다.
태권도 안팎에선 이미 판정이 내려진 경기의 승패 번복이 근래에 찾아볼 수 없어 놀라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중견 지도자는 “아시안게임에서 득점 계상 착오로 승패가 번복된 일은 있었지만, 국내 태권도 경기에선 처음 있는 일 같다”고 했다.
KTA 집행부는 앞으로도 심판 판정이 소청을 통해 잘못된 것으로 판단될 경우 승패를 번복하고 오판의 책임 정도와 고의성 유무에 따라 심판을 경고 또는 징계할 방침이어서 태권도 경기 문화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보인다.
■ 소청의 진행 절차
KTA는 지난 2월 소청제도를 대폭 개선해 판정이 번복되는 과정과 절차를 명확하게 했다.
판정이 끝난 경기에 대한 소청 절차를 살펴보면 1) 10분 이내에 소청을 하겠다는 의사를 경기부에 표시한 후 10분 이내에 소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소청비 7만 원) 2) 기술전문위원회들과 지도자들로 소청배심단을 구성한 후 3) 해당 경기의 비디오를 판독한 다음 4) 소청배심원들이 무기명 비밀투표를 실시해 다수결로 판정 번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소청배심원들의 결정은 최종적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심판 판정의 잘못 여부를 명확하게 판단하기 위한 소청배심단은 기술전문위원회 임원 3명과 지도자 중에서 4명을 선별해 구성하되 지도자 가운데 소청 건과 관련이 있는 지도자는 배제하고 있다.
■ 지도자들의 반응
대다수의 코치와 감독 등 지도자들은 소청 심사 결과에 따라 판정이 번복되는 제도 개선을 반기고 있다.
이전까지는 판정이 억울하거나 불만이 많아서 소청을 제기해도 판정이 번복되는 사례는 없었기 때문에 소청제도 자체를 ‘있으나마나한 유명무실한 제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류병관 용인대 감독은 “공정한 심판 문화를 위해 필요한 시스템이다. 다만 소청 절차를 법제화하고 경기 규정상의 불합리한 내용을 바로잡아야 한다. 잘못된 판정을 바로잡는 제도가 흐지부지되거나 유야무야되어선 결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청을 통해 오히려 억울하게 판정이 번복됐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은 “소청제도의 개선을 집행부가 무리하게 밀어붙이다보니 규정에 어긋나는 일도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심판들의 입장
KTA 상임심판들은 집행부가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소청제도 개선에 대해 대놓고 이렇다 저렇다 내색하지 않고 있다.
다만 판정 번복으로 인해 심판들의 자존심과 권위가 실추되지 않을까 부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최근 올림픽 평가전에서 소청에서 의해 판정이 번복된 경기를 담당했던 심판들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한 심판은 사적인 자리에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심판부 주위에서는 “우리가 경기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정을 받는 입장이 됐다”며 자괴 섞인 불평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에 대해 최정호 KTA 심판위원장은 “자신이 판정했던 경기가 소청에 의해 번복되면 심판으로서는 치명적이다. 문책이나 징계를 받기 전에 심판 스스로 느끼는 마음의 상처는 생각보다 크다”고 말했다.
■ 경기 진행상의 문제
소청을 통해 판정을 번복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됨에 따라 판정에 불만이 있는 각 팀에서는 당연히 예전보다 소청을 많이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잦은 소청으로 인해 걸핏하면 경기가 중단되고 대회 진행에 차질을 빚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KTA측은 경기 진행에 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KTA 경기분과에 따르면, 1개의 소청을 접수받아 결론을 내리기까지 대략 20-30분이 걸린다. 박흥신 경기위원장은 “리그전이나 토너먼트경기나 상관없이 20-30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경기 진행에 지장이 없다”고 설명했다. 만약에 예상보다 소청 심사시간이 길어지면 해당 체급의 경기를 잠시 중단시키고 다른 체급의 경기로 대체하는 등 운영의 묘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게 경기분과 측의 입장이다.
■ 소청제도의 개선점
공정한 판정 문화와 경기장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KTA 집행부가 강력한 의지로 실행하고 있는 현행 소청제도의 문제와 개선점은 무엇일까.
우선 현행 경기규정이 개선된 소청제도를 적절히 수용하고 있는지 엄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소청배심원으로 선정된 4명의 지도자들이 집행부 관계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판정의 잘잘못을 판별할 수 있는 분위기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박흥신 경기위원장은 “지도자들이 부담을 느낄까봐 비디오를 판독한 후 소감을 말하지 않고 심판 판정에 대해 무기명 비밀투표로 ○, ×만 결정하면 된다”고 해명했다.
심판 판정의 잘잘못을 명확하게 가리기 위해 태권도 경기의 촬영 장비를 개선하고 과학적인 분석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다.
최정호 심판위원장은 “올림픽 평가전처럼 중요한 대회에는 비디오 촬영장비가 3개, 그렇지 않은 대회에는 1개 정도 설치한다”며 “3개를 설치해도 사각지대가 있는 만큼 공중에도 비디오를 설치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아니면 말고’ 식의 무분별한 소청을 방지하기 위해 7만 원의 소청비를 대폭 인상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지만 KTA는 이 사안을 공식으로 논의하지 않고 있다.
■ 다른 종목의 사례
KTA가 올해부터 제도 개선을 통해 잘못된 심판 판정에 대해선 판정을 번복하게 되면서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본지 확인 결과, 격투기 종목인 레슬링은 경기 현장에서 비디오를 판독해 잘못된 판정을 번복하고 있다. 다만 A와 B 두 선수의 경기가 끝난 후에 소청을 통해 판정을 번복하는 것과는 달리 레슬링은 두 선수 경기 도중에도 각 회전이 끝나면 즉시 심의해 그 결과를 발표한다는 것이다.
유도는 원칙적으로 비디오 판독을 통한 판정 번복이 없다. 대한유도회 측의 한 경기 관계자는 “경기 현장에서 심판들의 판정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배심원과 심판위원회의 자문을 얻어 최종 판정을 내린다. 비디오 판독을 통해 판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다”고 했다.
세계복싱평의회(WBC)는 비디오 판정을 올해 시범 도입하기로 했다. WBC는 앞으로 심판 외에 WBC 관계자, 지역 커미션 관계자, 비디오 모니터 감독관 등 3명의 패널을 두고 판정에 논란이 있을 때에는 비디오 리플레이 화면을 참고하기로 했다. 패널 3명이 “심판 판정이 잘못됐다”고 의견일치를 보면 판정은 번복된다.
지난 1월 추성훈이 종합격투기 대회에서 미사키 카츠오에게 당했던 KO패도 무효로 결정났다. 사커킥을 맞고 KO패한 추성훈 측의 공식 항의를 받아들여 판정을 번복한 것이다. 이 결정은 경기규정 상 판정 번복이라기보다는 대회 진행상의 사정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구기종목인 축구, 배구 등에서도 잘못된 판정에 대한 판정 번복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제축구연명(FIFA) 심판위원회는 “비디오 테이프는 심판 판정 번복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프로축구 K리그에서는 지난해 9월 전북 스테보의 골이 상대팀의 항의로 노골로 번복된 예가 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이번 겨울리그부터 국제배구연맹 규정에 없는 ‘비디오 판독제도’를 도입해 잘못된 판정을 번복하고 있다.
서성원 기자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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