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는 발전해 왔고, 발전하고 있고, 또 발전해야만 한다. 이런 전체 발전의 핵심에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태권도 자체의 가치이다. 태권도가 원래 가치있는 것이라면 때로 사회적 조건 때문에 그 발전이 잠시 정체되더라도 언젠가는 그 가치가 발현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반대로 원래 그 가치가 적거나 없다면 지금 발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발전과정이 길지 않으리라고 예측할만하다. 그런 면에서 태권도 자체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이런 관점에서 태권도를 지식화하고 재조직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태권도의 가치는 어디에서 가장 쉽게 드러나는가? 그리고 어디에서 태권도 자체의 가치가 확보되는가? 바로 태권도 교본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현재의 많은 태권도 교본의 내용에는 문제가 있다. 그 가장 큰 문제는 교본이 태권도를 현실과 다르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기 태권도 교본을 보자면, 제일 처음에 역사와 철학 등에 대한 서설이 있고 기본적인 설명과 기본자세들에 대한 나열이 있으며, 그 다음에 품새들을 제시한다. 끝에는 세 번 겨루기와 한 번 겨루기가 있으며 몇 가지 호신술, 그리고 경기 규정과 해부학, 응급처치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품새이다. 그리고 겨루기, 특히 자유겨루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기법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기본적인 받아차기 기술이나 선제공격의 기술들도 설명되어 있지 않다.

왜 교본에 품새의 비중이 큰가? 태권도 교본을 쓰면서 품새들을 열거하는 것은 교본의 내용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에 필적할 만한 태권도 교본 저술 방식은 태권도 경기규칙을 나열하는 것이다.

교본을 쓰는 사람은 품새를 만들 필요도 없고 새로운 동작을 추가할 필요도 없다. 그저 품새 동작이나 자세의 사소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첨가하거나 그것으로 논쟁하면 된다. 예를 들어서 앞굽이 자세의 두 발의 간격은 어떠해야 하는지 앞의 높이와 각도는 어떠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만 설명하고 논의하면 또 다른 교본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사람들이 태권도에 매료될 때 정말 그런 품새만은 아니다. 겨루기나 호신술 상황에서 보게 되는 태권도의 강력하고 화려한 발차기들이 태권도를 가장 빛나게 한다. 즉 품새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품새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들이 태권도에 있으며 그것은 뛰어난 발차기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실질적인 겨루기 기술이란 말이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대로 현재의 태권도 교본들에도 발차기나 다른 기본 기술들, 겨루기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형편없이 적고 빈약하다. 돌려차기 하나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돌려차기는 이렇게 차는 거야"라고 말하듯이 사진 몇 장과 동작을 설명하는 간단한 문장 몇 개만 보고 그것을 습득할 수 있는 수련자는 아무도 없다.

단순한 돌려차기 하나라도 거기에는 복합적인 역학 원리가 작용하며, 동시에 수련자가 훌륭한 돌려차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수련해야 하는 과정은 길고 복잡하다. 최소한 어느 단계까지는 허공차기를 연습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미트 차기를, 그리고는 샌드백 차기와 호구입고 상대를 차는 훈련 등등이 설명되어야 한다.

뒤차기나 뒤후려차기와 같은 어려운 기본기에 들어가면 설명해야 할 것과 보여주어야 할 것은 더 많아진다. 때로는 흔히 수련자들이 취하는 잘못된 수련방식과 자세 등에 대한 지적도 교본의 내용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돌개차기나 나래차기 등, 태권도를 빛내는 독특하고 난이도 있는 발차기 기술들은 아예 설명이 되어 있지도 않다. 실제로 수련자들이 교본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내용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필자가 생각할 때 그 가장 큰 이유는 교본 저술자들의 나태함과 구태의연함이라고 생각한다. 강조해서 말하자면 무식이나 무지가 주된 원인이 아니다. 태권도인들은 어려운 철학적 용어나 수학은 모를지라도 태권도에 관한 가치있는 지식들을 정신과 육체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태권도인들은 결코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지식들을 글로 표현하고 교본에 넣는 일에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편하고 가장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교본을 저술한다. 즉 품새들을 열거하고 경기규칙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발견이라고 떠들어대는 태권도 원리들도, 그것이 품새의 자세나 각도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라면 도토리 키재기와 같이 같은 주장들일 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신력있는 기관이 나서서 학회를 구성하고 보다 개혁적이고 연구하는 자세로 태권도에 대한 연구와 저술 작업을 활발히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다시 여러 태권도인들이 인식을 같이 하고 보다 태권도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이창후 서울대 철학과 강사  wtkd@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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