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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20>퇴계의 청에 명종이 친필 사액(賜額)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11.13 13:43
  • 호수 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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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紹修書院) -2]
 

용모를 보면 대체로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선천적인 성격이나 후천적인 삶의 흔적이 그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rule)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방통(龐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다.

 

   
고려시대에 제작되어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안향의 초상화. 국보111호.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의 원류 죽계수를 넘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숲속에 소수박물관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안에 공자 주자 안향 주세붕 이퇴계의 청동흉상이 모셔져 있다. 대체로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모습들과 유사하다.

 단 하나의 예외가 주세붕의 모습. 학자이며 청백리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선생의 용모를 막연하게나마 상상해 보았을 때의 그 모습과 아주 다르다. 엄청난 턱수염, 부리부리한 눈매, 전체적으로 커 보이는 얼굴 등이 조금 세련된 장비(張飛)처럼 보이게 한다. 안쪽에 있는 초상화를 보면 체격까지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학자치고는 기골이 장대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우리나라 서원의 창시자이다.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업적을 남기려면 본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을 잘 만나야 된다. 이순신 장군이 태평성대에 태어났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신재는 중종과 명종 때 사람이다. 27세 되던 해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들어섰고 20년 후 풍기군수를 지내게 되었을 때 관내 순흥(順興)이 안향의 연고지임을 알고 그를 기리기 위해 처음에는 사당을 세웠고 이듬해 서원을 지었다. ‘백운동서원’, 이것이 최초의 서원이다.

 이때 사당 세운 것을 ‘사묘(祠廟)’를 세웠다고 많이들 표현한다. 관광안내책자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가볍게 사용하는 사전에 없어서 국어대사전을 보아도 그런 단어는 없다.

 왜 사전에도 없는 말을 즐겨 사용할까? 사당보다는 훨씬 격조 있게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종의 인플레이션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슬며시 짜증이 난다. 유교와 관련된 명칭의 난립을 지적한 바 있거니와 유교적 제사문화에도 혼란스러움이 있다. ‘사당’이 무엇인가. ‘신주(神主)’를 모셔놓은 집이다. 이를 또 다른 말로 가묘(家廟) 또는 사우(祠宇)라고도 한다.

 그럼 신주는 무엇인가. 죽은 사람의 위패(位牌)를 말한다. 끝까지 가보자. ‘위패’는 무엇인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써 ‘아무개 신위(神位)’라고 쓴 조그마한 나무조각 표지판이다.

 

   
소수서원을 감싸고 도는 죽계수.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 아무데서나 허공에 대고 그야말로 정처 없이 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장소와 위치를 정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신주를 위패 말고 사판(祠版) 또는 목주(木主)라고도 한다. 주로 밤나무로 만들며 길이 8치, 폭 2치의 크기에 위쪽은 둥글게, 아래쪽은 각(角)을 지게 만든다.

 아무튼 제사 지내기 위해 신주를 놓아둔 집이 사당인데 특수한 사당이 둘 있다. 하나는 역대 임금들의 사당인 바 이는 종묘(宗廟)라 한다. 또 하나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으로 이는 문묘(文廟)라 한다. 일반인들과 격을 달리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갈공명의 경우에도 ‘사당’이라는 명칭을 쓴다. 두보의 시 ‘승상을 생각하며[蜀相]’의 앞 부분에 “승상의 사당을 어디 가 찾으리오/ 금관성 밖의 잣나무 삼렬한 데로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栢森森)”라고 되어 있음을 본다. 후에 조금씩 변형이 되기도 했고, 이에 따라 용어도 포괄적인 형태가 나타나 사당과 묘를 합해서 ‘사묘’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듯하다. 복잡하다.

 신재 주세붕을 이어 풍기군수가 된 분이 바로 이퇴계이다. 신재는 후임자를 정말 잘 만났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는 부임한 다음해 바로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으로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때는 명종 5년(1550).

 당시 16세였던 소년 임금 명종과 50세의 퇴계는 각별한 사이였다. 명종이 퇴계를 엄청나게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박영규 지음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은 상소를 올렸을 때보다 조금 뒤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명종은 그(퇴계)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보고 자주 그에게 조정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듣지 않자,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灘 ·현인을 초빙했으나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구나/ 灘은 歎의 잘못 씀이 아닌지?)’ 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 및 ‘도산잡영’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고는, 그것을 밤낮으로 쳐다보며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이런 정도였으니 사액서원으로 만들어 달라는 퇴계의 청을 명종이 거절할 까닭이 있었겠는가. 단순히 퇴계의 청을 들어주는데 그치지 않고 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명종이 직접 써준 현판.
우선 이름부터 고치게 했다. 대제학 신광한이 지어올린 ‘소수(紹修)’라는 말을 합당히 여겨 서원의 이름을 새로 지어주었다.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旣廢之學紹而修之)’는 뜻에서 紹와 修를 뽑아 쓴 것이다. 이를 가지고 명종은 친히 간판[額]을 써 주었는데 10대 중반의 소년이 쓴 글씨 치고는 매우 깔끔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아울러 서원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밭[學田]과 노비(奴婢)를 붙여주면서 면세(免稅) 면역(免役)의 특권까지 내려주었다. 이렇게 되어 사액서원이 처음 탄생한 것이다.
 
 ‘서원’이라는 명칭은 8세기 중국의 당나라 현종(玄宗)때 처음 등장하지만, 당시의 서원은 궁중에 있던 서적 편찬기구의 이름이었을 뿐이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은 11세기 송나라 때 나타난다. 사립학교인 사숙(私塾)에 조정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비롯된다. 수양·석고·악록 ·백록동의 4대 서원이 널리 이름을 날렸는데 그 중에서도 주자(朱子)가 직접 강론을 했던 백록동(白鹿洞) 서원이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보다 5백년 앞선 것인데 서양의 서원은 중국보다도 천년이나 앞선 역사를 지닌다. 오늘날의 터키 서부, 옛날에 소아시아라고 불리던 지역의 에베소에 ‘두란노서원(Hall of Tyrannus)'이 있었다. 저명한 철학자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는데 헬라인의 철학이 강의되던 곳이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2년 동안 복음을 전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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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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