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 미국인이 태권도를 배우러 한국에 왔다. 그리고는 같이 태권도 수련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은, 농담삼아 던진 말로, 전생에 한국 사람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고 태권도에 대한 애정 역시 그만큼이나 각별했다.

그러면서도 또한 이방인의 입장에서 한국의 태권도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점들을 발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런 미국인이 한 얘기 중에서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전해 볼까 한다. 이것은 너무 평범해서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이미 생각해 보았을 법한 문제, 하지만 태권도의 발전적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태권도 교본의 내용이다.

이 사람이 태권도를 너무나 열심히 수련했기 때문에, 그만큼 태권도 교본에도 관심이 많아서 좋은 교본을 찾아 헤매었다고 한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발견한 태권도 교본의 내용이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랬다.

즉 처음에 태권도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아주 간단한' 설명이 있고, 그 후 기본자세에 대한 설명들과 사진들이 제시된다. 그 후에는 태극부터 유단자 품새까지 품새들이 제시된다. 품새들에 대한 사진이나 그림, 그리고 설명이 끝나면 교본의 내용도 끝난다. 때로는 태권도 경기에 대한 규칙들, 경기장 규격에 대한 설명이 덧붙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 이것이 태권도를 대표하는 태권도 교본의 내용이고, 그리하여 태권도란 바로 그런 무예로서 알려진다. 한국에서 태권도를 하는 우리들, 그리하여 세계 어느 나라의 태권도인들보다 태권도가 어떤 무예인지 잘 아는 우리들이 아는 태권도란 바로 그런 무예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그러하다.

이런 태권도 교본의 내용이 50년 전부터 거의 변하지 않고 내려왔다는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태권도는 발전했지만 태권도 교본은 결코 발전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조금은 달라졌다. 옛날의 품새들이 지금의 품새들로 바뀌었고, 동작이나 자세에 대한 용어들도 바뀌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뀌지 않았다. 그 중요한 것이란 바로, 태권도를 태권도이게끔 하는 것, 즉 태권도의 본질이 교본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권도의 모습은 태권도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발목잡고 있다. 태권도 역사에 대한 가라데 유입론의 실체도 바로 이런 태권도 교본 하나도 제대로 태권도의 본질을 반영하지 못하는 데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태권도 교본에 품새 밖에 없으니 그것이 태권도인양 생각한 채, 가라데와 비슷하니 다르니 따지고 있는 것이 바로 가라데 유입론의 실체이다.

태권도 교본의 내용을 정체된 상태로 발전시키지 못한 태권도인들의 무책임한 행동이나, 그런 잘못된 허상을 부여잡고 그것이 가라데와 비슷하니 다르니 하고 역사 논쟁을 하고 있는 멍청한 학자들이나 사실 별반 다를 바가 없기는 하다.

이런 문제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태권도의 보다 심층적인 문제는 '지식화'이다. 태권도가 올바르게 지식화되어야만 발전할 수 있는데, 그 지식화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태권도학과의 커리큘럼의 문제나, 태권도학과 학생들의 경험에서도 나타난다. 몇몇 학자들은 태권도학과의 커리큘럼이란 대체적으로 체육학과의 커리큘럼을 조금씩 변형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비관적인 견해를 태권도학과 학생들의 경험이 뒷받침해준다. 즉 그 학생들은 태권도학과에서 태권도에 대해서 특별히 더 배운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물론 겨루기 연습을 더 많이 하고 품새 연습을 더 많이 하고 시범 연습을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연습들은 중요한 경험이고 학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더 배웠는지 정확히 가르쳐주는 태권도학과의 수업은 부족한 것 같다. 바로 대학생들이 그런 불충분한 자기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제 이런 인식 하에서는, 태권도학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보다 잘 갖춘 사람들은 태권도학과 출신들이 아니라 체육학과 출신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 유럽에서 온 태권도인들이 하는 말은, 가라데나 우슈 역시 마찬가지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가라데인들이 승단 심사를 보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수십 개의 품새(가타)를 외우는 일 뿐이다.

그렇다면 태권도에는 더 큰 가능성이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지적하듯이 미래는 지식의 시대이다. 공신력있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태권도의 모습인 태권도 교본의 내용을 빨리 훌륭하게 조직화해서 개편해야 한다.

그리하여 태권도를 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무예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태권도를 한 차원 높은 방향으로 재조직화하고 지식화할 수 있을까? 다음 시간에 그 내용을 상세히 짚어보도록 하겠다.

이창후 서울대 철학과 강사  wtkd@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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