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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⑬내삼문 돌계단에 4백년 배롱나무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09.14 09:50
  • 호수 739
  • 댓글 0

[병산서원(屛山書院) -5]

   
서원 안마당의 매화나무
서원 안마당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그네를 따뜻하게 반겨준 건 매화 나무였다. 쉽게, 동재(東齋)라 불리는 일신재(日新齋) 앞의 매화나무. 사진에서만 보다가 이제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거리에 마주서니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듯 야릇한 반가움이 샘솟았다.
 
 가녀린 고운 자태는
 불타는 정열
 골리앗 겨울바람을
 물맷돌 매운 솜씨로 몰아내고
 황량한 빈자리에
 봄을 데려다 세워주는 꽃

 신비하고 은은한 향기는
 매직 포션 넘버 나인!
 겨우내 책더미 속에 칩거하던
 선비들을 황홀경으로 데려가
 모든 시름 잊게 해주는 로터스[忘憂樹]
 
 지금은 계절 지나 사라진 듯하지만
 그 향기와 그 자태
 서원 구석구석을 적셔있네
 아무렴 옥설(玉雪)과 청진(淸眞)이야 영원히 변함없겠지

입교당(立敎堂)을 돌아 뒤뜰로 가니 오른쪽에 장판각(藏板閣), 왼쪽에 전사청(典祠廳)을 거느리고 사당인 존덕사(尊德祠)가 깊은 침묵 속에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굳게 닫힌 내삼문과 울타리 안에 사당이 도사리고 있어 평소에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존덕사는 서애 유성룡 선생과 그분의 셋째 아드님인 유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은 선비정신에 입각하여 검소하게 꾸며진 데 비해, 사당과 그 주변은 단청(丹靑)도 하고 태극문양을 그려 넣기도 해서 대조를 이룬다. 사당은 위엄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부속 건물인 전사청은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도구를 보관하고 제사 물품을 준비하는 장소. 장판각은 책과 각종 자료들을 지니고 있다.

   
존덕사 앞의 배롱나무
태극문양의 내삼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양쪽 언덕에는 4백년 가까이 된 배롱나무(목백일홍)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뽐내며 서 있다. 지난번 도동서원 경내에서도 배롱나무들을 보았는데 왜 서원들은 이 나무를 좋아할까? 경북지방의 풍토가 배롱나무 자라기에 적합해서 그런가? 황동규의 ‘버클리 시편3’에 “카멜 가는 길 / 고속도로 분리대는 계속 나무 백일홍” 이라 했으니 미국에서도 잘 자라고 원산지는 중국이라 하지 않는가.
 
 오뉴월 뙤약볕 아래/ 마지막 득도 터진 붉은 꽃/ 거침없는 탄성/ 줄기마다 망울져 미어 올랐다 (중략)
 석 삼월 비난수 꽃 피우고/ 제 몸까지 붉게/ 훌훌 털어 버리는 비움/ 주저마저 벗겨 낸 속살
 나목이 되어/ 묵향 짙은 서재 곁에서/ 산사 속 빈 목어 뒤에서/ 혹은 도심의 대로 분리대에서
 백일홍 화무 백일홍/ 여름 한 철 설법 피우고/ 배롱 나무 배롱 나목/ 속속들이 홍진 미끄러뜨린다 <정보암의 백일홍 배롱>

 돌담길 돌아/ 몸 굽은 배롱나무도/ 뙤약볕 아래 당당한데
 선홍빛 꽃들은/ 자글자글 피어나/ 정열의 가슴으로/ 사랑을 기다리네
 첩첩산 바라보며/ 어제는 꽃/ 오늘은 열매 맺어/ 푸르고 깊은 그늘자리 만들었네
 곁가지에서 °우듬지로/ 건너뛰던 작은 새/ 꼴 송이송이 입에 물고/ 어디로 갔을까 (후략) <양소정의 배롱나무 꽃>
°우듬지 : 나무의 꼭대기 줄기

배롱나무와 서원의 어울림을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① 매끄럽고 고운 껍질은 친화력(親和力)을 상징한다. 우리 주변 산과 들에서 이처럼 줄기가 매끄러운 나무는 없는 것으로 안다. 껍질이 있긴 한데 얇은 조각으로 벗겨져 떨어지기를 반복하므로 줄기는 늘 매끄럽게 유지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나무 가까이 다가가기를 즐긴다. 필자도 내삼문 계단 왼쪽에 있는 나무의 줄기를 한동안 만져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② 그처럼 나무의 피부가 고우니 ‘잘생김, 멋쟁이’의 상징이 된다. 이것도 선비의 이미지에 상당 부분 어울린다.
 ③ 찬[冷] 성질 역시 선비의 기개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불의(不義)또는 진리가 아닌 것을 보거나 접촉하게 되면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고 서릿발처럼 대항하거나 돌아서 버리는 정신을 말한다.
 ④ 백일 붉은 꽃.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했다. 아쉽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유독 이 꽃은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석 달 가까이 피어 있다. 10~20cm의 붉고 탐스런 원추 꽃차례. 이 특징은 학문적인 업적과 성과를 풍성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오랫동안 유지하기를 기원하는 마음과 맥을 같이 하는 게 아닐까.
 
서원 구석구석을 모두 돌아보고 천천히 내려가는 길.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잠재의식의 저편에서 나다니엘 호오돈의 ‘큰 바위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작품의 주인공 어네스트와 병산서원이 동류항으로 묶여 같은 이미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세상의 참다운 것이란 이처럼 소박하면서도, 깊은 배려 속에 자연과 조화를 이뤄내는 바로 그것이다. 그게 결국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제사 준비중인 전사청
갑자기 저 아래 만대루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두어 사람이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요란하기도 해라. 그냥 스쳐 지나치려는데 가까이서 들으니 일본 관광객들. 얼핏 보기에 중년을 넘긴 부인들이었다.
 “도쿄에서들 오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는 오지 않는 곳인데, 어찌 일본에서 오신 분들이 ….”
 “저희들은 한국을 좋아합니다. 여러 차례 방문했지요. 서울과 지방의 어지간히 이름난 곳은 거의 다 가보았습니다. 한국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병산서원을 찾았습니다.”
 “참 재미있는 분들이시군요.”
오랫동안 일본어를 놓고 있었더니 말이 자주 막혔지만, 그리고 아는 것도 많지 않았지만 성의껏 설명해 주어야 옳을 것 같았다.

돌아가는 발걸음을 뻐꾸기가 붙잡았다. 도동서원에서는 도착할 때 뻐꾸기가 울었는데 여기서는 떠날 때 운다. 뻐꾹 소리를 자꾸 돌아보는데 “또 다시 꼭 들러주세요.”라고 당부하는 듯싶어, “그러마”고 약속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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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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