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한인사범 수기(10)] ‘돌멩이 되게 하소서’-5

흑인 제자의 살인 사고

방황과 절망 속에서도 꿈은 계속되고

처음 도장을 개관했던 장소는 흑인들이 살던 지역과 백인들이 살던 지역의 중간 지점이었다. 가끔은 술 취한 멕시코인들이 주정을 부리면서 도장 앞을 지나가곤 하였다. 상가 건물 안에 있는 도장이라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으나 그린빌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건물들이 지어진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끔씩 밤이면 경찰들이 순찰을 돌곤 하였다.

어느 날 새벽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불빛이 나의 얼굴에 다가와 놀라서 잠에서 깨었다. 경찰이었다. 순찰 도중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 왔다는 것이었다. 도장의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던 당시 나의 상황은 참으로 암담했다. 상가 건물 안에서는 숙식을 할 수 없었는데, 나는 형편이 좋지 않아 따로 살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도장에서 밥 해먹고 살던 터였는데 경찰의 출현은 나를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새벽 두 시경, 나는 경찰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이제 막 도장을 개관했는데 아직 기숙할 곳을 찾지 못해 도장에서 묵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약 30분 정도를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는 다음날 나를 다시 찾아와 나의 도장 학생이 되었다. 그 새벽 손님이 나에게는 경찰 쪽 사람들에게 도장을 알리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여 준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이제 막 20세 정도 되어 보이는 흑인 청년의 방문을 받았다. 이름을 허버트라고 하였다. 허버트는 약 4~5년 운동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인 밑에서 운동을 배워보는 것이 그의 꿈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시 그는 등록을 하고 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매 수련시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성실히 참가하는 열성 수련생이었다. 운동 실력도 좋았다. 4~5년의 경력 때문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인지 그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운동을 잘 했다.

하루 종일 페인트공으로 일하고 오후에는 도장에 와서 살았다. 그러다보니 하루 일과가 끝이 나면 나는 그를 집에다 데려다 주는 것이 일과의 연장이 되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내가 밤마다 흑인 지역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이 그곳은 위험한 곳이니 밤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던 그러한 곳이었다.

그는 나를 형처럼 따랐다. 나 역시 그러는 그가 밉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와서 수련을 하고, 매사에 열성적으로 임하던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터인가 발걸음을 뚝 끊어 버렸다. 웬일인지 궁금해도 연락할 길이 없었다. 그에게는 전화도 없어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에 그가 나를 찾아 왔다. 그러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여인이 자기를 외면한다는 것이었다.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고 회피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허버트보다 10세 정도 연상인데 그를 그만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허버트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던 친구여서 정에 굶주려 있었다. 일단은 잠시 시간을 두고 떨어져 지내보라고 권하였다. 그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물러갔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다시 찾아갔고, 허버트의 잦은 방문에 화가 난 그녀는 법적으로 접근금지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거의 매일 밤 나를 찾아와 하소연했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며칠 후, 이른 아침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허버트였다. 그는 대뜸 하는 말이 “사범님, 죄송합니다. 사범님과 태권도에 먹칠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그리고 머뭇머뭇거리더니, “혹시, 형사가 사범님을 찾아갈지 모릅니다. 용서 하십시오”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영문을 몰랐다. 왜 그가 그런 전화를 했는지, 하지만 그날 밤에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TV 뉴스에 그의 얼굴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살인사건 발생. 30대 여인, 칼에 여섯 번 찔린 채 발견. 살인 용의범으로 허버트 해리스 구속’ 이라는 말과 그의 얼굴이 구석에 함께 등장하였다. 다음날 도장 수련생들이 도장에 와서 그 사건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도장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어 버렸다.

한 동안 나는 제자의 그런 일로 인하여 몹시 괴로웠다. 그 제자가 안타까웠으며, 또한 내가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 게 나 자신을 괴롭게 하였다. 그래서 도장 운영을 포기할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마침 그 때 형님께서 버지니아에 올라와서 도장 하나를 맡으라는 제안을 하기에 나는 더욱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그 기도, “나로 돌멩이 되게 하소서, 쓸모 있는 돌멩이 되어 세상의 모퉁이 돌 되게 하소서”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이병석 tkdnews@korea.com

이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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