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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의 걸어서 탐라(耽羅)일주(2)4계절이 공존하는 3월의 제주
  • 최창신 고문
  • 승인 2008.04.01 14:28
  • 호수 584
  • 댓글 1

깊은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어느덧 비행기가 제주공항 활주로 위를 진저리치듯 구르고 있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심호흡을 하고 공항청사 밖으로 나갔다. 타이어에 바람을 펌프질하듯 온 몸에 긴장감을 팽팽하게 불어 넣었다.

최창신 상임고문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빗줄기가 그리 굵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걷기로 작정하고 '탐라 일주'의 첫발을 내디뎠다.

서해안을 달리는 일주도로를 타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빗줄기는 시나브로 굵어져 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마침 제주일보사가 있어 김창기 (金昌琪)전무를 만나기 위해 잠시 들렀다. 등산복 차림에 잔뜩 비를 맞은 몰골로 남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멋적어 로비에서 인사만 나누고 가려 했으나 한사코 들어오라 하여 차대접까지 받게 되었다.

'의리의 사나이'로 알려진 김전무. 왕년에 제주도를 대표했던 태권도 선수출신으로 지난 20년 동안 실무 부회장으로 제주도협회를 이끌었던 정통 태권도 맨. 자칫하면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질 것 같아 서둘러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신문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노형동의 한식당에 들러 다소 늦은 점심식사를 마쳤다. 제주도 특유의 고등어 조림. 맛이 좋았다. 그 상황에 무엇은 맛 없었겠나?

오후 1시30분, 30㎞떨어진 한림까지 가기로 목표를 정하고 일주도로로 접어 들었다.

애월(涯月)까지 가는 긴 거리에서 유일한 동반자 김창완(金昶完)국장과 나는 악전고투를 면할 수 없었다. 잠시 꺼끔하던 비가 세찬 빗줄기로 바뀌었고 강한 바람에 실려 얼굴을 때리는데 매우 따가웠다.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들여다 보니 굵은 우박이 섞여 있었다. 앞서 가는 김국장은 갈짓자걸음. 나는 더 했겠지. 그만큼 바람이 강했다. 버스 타고 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았으면 술에 잔뜩 취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너무 손이 시려 면장갑을 하나씩 사서 끼었으나 그나마 비에 젖고 바람이 매서워 아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이게 뭐야?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유심히 체크했지만 영상 10도 정도의 봄날씨였는데…. 이건 사뭇 고약한 겨울이잖아!

심신을 가다듬고 좌우 풍경을 꼼꼼하게 관찰하며 걷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현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걷고 있는 서해안 지방에는 기이하게도 4계절이 공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유채꽃과 매화 등이 만발하여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가 하면, 한여름에나 볼 수 있을만큼 왕성하게 자란 양배추류의 밭작물이 힘찬 물결을 이루고 있으며, 노란 귤들이 탐스럽게 달려 있는 광경은 틀림없는 가을이고, 느티나무 벚나무 목백일홍 등의 교목(喬木)들은 앙상한 가지를 옹송그리고 서서 겨울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험상궂은 날씨가 천지를 음산하게 뒤집어 놓으니, 여기서는 마치 '밝음과 즐거움, 소망'을 주제로 하는 시인 김남조(金南祚)의 계절과 죽음이나 파멸, 빈곤이 특징적인 T.S. 엘리오트의 계절이 한데 섞여 불협화음으로 독특한 조화를 빚어 내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계절은 하나의 출발, 가을이 새로 열리는 곳에 씻은 마음의 청과(靑果)를 담아 내리라. 한 계절은 오고 하나는 또 가건만 빛과 열락(悅樂)을 금하는 계절은 없다. 삶의 욕구와 즈문 소망을 못 갖게 하는 계절은 결코 없다." (김남조/ '생명의 시원(始源)'에서)

"겨울은 바다에서 죽음을 끌고 올 것이다. 파멸의 봄은 우리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처참한 여름은 시내 밑바닥까지 태워 버릴 것이고, 가난은 다시 쇠진하는 10월을 기다릴 것이다." (T.S. 엘리오트/'대성당의 살인'에서)

유채꽃이 만발한 3월의 제주

애월면 고성리를 지날 무렵 날씨는 많이 누그러졌으나 발에 희미하지만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악천후 때문에 쉬지 않고 걸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두어달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왼쪽 발에 통증이 샘물처럼 고여 가고 있었으며 오른발 두번째 발가락이 마비증상을 보이며 부어 오르는 듯 했다. 오른쪽 허벅지는 위에서 아래로 날카롭게 베는 듯 한 아픔이 훑어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왼쪽으로 올려다보이는 항바두리성(缸波豆里城)에서 7백 30여년 전 몽고 침략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다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한 김통정(金通精)의 삼별초 최후부대가 당했던 그 통한의 아픔과 좌절에 비할 수 있으랴!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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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상임고문

- 현 국기원 이사.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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