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17일 박영지(14,고색중3)양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곰팡이로 얼룩진 4평짜리 차가운 방에 인형처럼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침침한 불빛 아래 외할머니(62), 어머니(38), 영지(14), 여동생(10), 그렇게 네 식구가 마치 그림자연극의 주인공들처럼 소리없이 숨쉬고 있었다. 어디서도 명절 기분은 느낄 수 없었다. 10년 넘게 이어져온 가정폭력이 빚어낸 참담한 현실이다.

그러나 예전과 다름없이 어둡고 추운 방이지만 영지는 지금 그 좁은 방 속에서 소중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올겨울 처음으로 난방 스위치를 켰다는 방 한 쪽 벽에 붙어있는 문대성 선수의 사진, 14살 영지의 희망을 상징한다. 처음 접한 태권도가 지금은 어려운 환경 속 영지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태권도로 새 희망을 얻기까지 영지는 이 세상이 무섭고 싫기만 했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여러 차례. 심지어 학교에서 자해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영지를 도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옥상에 올라가 두어 시간씩 고민하다 울면서 내려오곤 했어요,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소식을 고색중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들은 박경원(29, 수원청소년상담센타) 선생님의 꾸준한 관심이 마침내 영지의 마음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영지 식구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인근 경희대 대한태권도장의 박선훈 관장의 자상한 태권도 지도가 영지에게 새 희망을 심어주었다.

영지 가족의 비극은 전형적인 '가정 폭력'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영지를 임신 중이던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의 폭력이 행해졌고 돌 기념사진에조차 영지의 얼굴엔 새파란 멍 자국이 선명하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술과 놀음을 일삼았고 폭력은 갈수록 심해졌다. 한번 시작된 폭력은 어머니가 실신할 때 까지 멈추지 않았다. 1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일어났다고 했다. 폭력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이빨이 다 빠져버려 마스크를 한 채 외출을 삼갈 정도였다.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청산하려고 이혼을 하게 된 어머니.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잔혹했다. 네 식구가 잘 살아 보자고 마음을 다져먹은 것도 잠시, 오래도안 부랑아로 살아온 외삼촌에 의해 이혼한 아버지와 똑같은 폭력이 3년간 계속됐다. 네 식구의 유일한 수입인 기초생활 수급비 16만원 전부를 매달 외삼촌이 술값으로 탕진해 식구들은 한 끼도 배불리 먹어 본적이 없었다.

그 외삼촌이 최근 어디론지 살아지고 비로소 식구들이 안도의 긴 숨을 내쉬려는 때 또다시 어이없는 일이 터졌다. 이혼 전 아버지가 어머니의 신용카드를 몰래 사용해 5000만원의 큰 빚을 지게 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어머니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영지를 고등학교까지라도 보내고 싶은데 아무 일도 못하는 상황이라며 어머니는 말을 잊지 못한다.

영지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 박선훈 관장은 "저도 어려운 사정에서 도움받아 운동했었다"며 "영지가 처음에는 불안감이 상당했다. 체계적으로 운동시켜서 본인의 의지만 다져진다면 진로 문제도 잘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어린 탓으로 태권도를 수련하는 시간만큼은 밝게 웃는다는 영지. "태권도대회에 나가 금메달 따면 엄마 목에 꼭 걸어 줄께"라고 다짐한다.

가정폭력으로 시들어진 영지의 꿈인 태권도를 계속할 수 있는 태권도인들의 온정의 손길을 기대하며.

정대길 기자  dssim22@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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