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전환 과정
아무 것도 모르고 무작정 건너온 미국이었다. 와보니 사정들이 내 생각과 너무도 달랐다. 신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었다. 한인교회에서 한글과 태권도를 가르치기로 하고 관광비자에서 취업비자로 변경을 신청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우선 고용단체가 특정인을 고용할 경제적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고, 고용인이 일하고자 하는 분야에 필요한 자격 있는 사람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한국말과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과 교회 단체에서 다년간 봉사한 경력을 인정받았다. 이러기까지 변호사를 통해 증빙서류를 제출하고 몇 번에 걸친 보충 서류를 제시하고 나서 2년 만에야 종교 취업 비자인 R 비자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신분유지를 위해 협조해주는 것만으로 사전 협의가 있었다. 생활비는 불법이지만 청소 일을 해서 내가 충당해야 했다. 입국 다음날부터 청소용역을 하시는 장로님을 따라 청소를 나갔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쓰레기통 비우고 걸레질하고 먼지 털고 정신없이 다녔다. 취업 비자가 나오고 어느 정도 기다려 다시 영주권 신청을 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들이 만만치 않았다. 과정마다 막대한 변호사비용을 내야 했다.
한글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해서 불법으로 먹고살려니 수입도 적고 떳떳하지 못해 경제적, 심적 부담이 컸다. 게다가 연봉 1만 5천달러를 번다고 보고한 내가 매년 낸 세금은 30%인 4천 7백달러였다. 어디까지나 외국인 신분이기 때문에 세금 감면 혜택 등은 하나도 받지 못한 채 법률이 정한대로 세금을 매기기 때문이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영주권은 물 건너가는 것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내야 했다.
청소해서 버는 돈도 다 받지 못했다. 일한 것에서 15%를 뺀 나머지만 받았다. 남의 이름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피고용인과 청소 회사가 내야할 세금을 뺀 만큼이다. 그러니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침이나 밤늦게는 빌딩 청소, 낮에는 흑인촌 슈퍼마켓이나 옷가게에서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주 4일은 교회 체육관에서 한글 학교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쉬는 날 없이 일을 해야 했다. 일 끝내고 돌아오면 새벽 네 시였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이 모이질 않았다. 생각했던 영어 공부는 물 건너 간지 오래였다. 옷은 싸구려 흑인 가게에서 사 입었다. 그러니 사람이 품위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엉망인 생활과 과로로 몸이 망가졌다. 갑자기 허기가 확 지고 힘이 빠지며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손에 힘이 빠져 자동차가 휘청휘청 달렸다. 그럴 때면 임시방편으로 설탕이 잔뜩 발라진 도너츠를 사 먹었다. 점원이 손을 떨고 다리가 휘청거리는 나를 약물 복용자로 보기도 했다. 이럴려고 미국 왔나 싶었다. 외롭고 힘들어 가슴이 마구 무너졌다.
한글학교 태권도 사범
미국 와서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한글학교에서였다. 한글학교라 하지만 유치원꼬마부터 고등학교 학생까지를 총괄한 이민 2세들이었다. 나이 구분 보단 한글 실력에 따라 반을 나눈다. 난 영어가 안되고 아이들은 한국말이 안되니 의사소통 자체가 어려웠다.
처음엔 아이들이 너무 버릇이 없어 보였다. 뭘 시켜도 말대답이었다. “어허 이런 버르장머리들하곤... 전체 엎드려 뻗쳐!” 사내애고 계집애고 할 것 없이 죽도(竹刀)로 한 대씩 정신 바짝 나도록 패 버렸다. 맞은 아이들이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멋모르고 울려고 하던 녀석들도 내 호통에 놀라 울음을 꿀꺽 삼켰다. “울어? 우는 녀석은 한대씩 더 맞는다! 감히 사범을 뭘로 알고.” 그 뒤로도 좀 맘에 안 든다 싶으면 그냥 엎어놓고 패 버렸다. 구경하던 부모들도 내가 너무 당당히 때리니까 아무도 뭐라 못했다.
처음엔 아이들이 나를 무서워만 하고 잘 따르지 않았다. 부모들이 억지로 밀어 넣은 태권도 시간에 영어도 못하는 사범이 군기반장 모양으로 그저 패고 기합만 주니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게 아니다 싶어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을 했다. 가급적 상냥하게 대해주고 기합도 덜 주고 때리는 일은 아예 그만 두었다. 그러고 나니 차츰 아이들과 친해졌다. 나중엔 나만 보면 큰 놈, 작은 놈 할 것 없이 달라붙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주급을 쪼개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사주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었다.
무슨 옷을 입던 무엇으로 밥을 먹고살던 그나마 내가 ‘사범’ 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들에겐 나는 영원한 ‘사범님’이었다.
한글학교라고 하지만 한글만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지역사회 봉사와 한국 바로 알리기 일환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로 태권도를 지도해 주었다. 미국인들 중에 태권도를 배우다가 나중에는 아예 우리 교회로 출석하는 청소년들도 있었고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져 한글학교에 등록하여 한국말을 배우는 성인들도 여럿 생겼다.
교회 청년회원들을 모아 태권도 시범단을 조직했다. 각자 특기 하나씩을 정해 가르치다 보니 웬만한 시범단 수준이 되었다. 교회 커넥션을 타고 소문이 난 덕분에 여러 주를 다니며 시범을 하기도 했다. 미국인 교회에서는 이런 우리들을 얼마나 신기해하며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미국도 중고등 학생이 되면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교과 성적 외에 스포츠, 사회 봉사 등의 과외 활동이 입학 사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태권도 시범을 통해 미국인 교회, 양로원, 노숙자들의 쉼터, 거리축제 등 각 곳을 다니며 부지런히 봉사활동을 펴왔다. 이것이 대학 입시에 특이한 경력으로 인정되어 큰 경쟁력이 되었다. 학교에서 주제 발표시간엔 태권도를 택했다. 다른 학생들이 악기, 스포츠 등 일반적인 주제로 발표를 하는 것과 달리 우리 학생들은 도복을 입고 즉석에서 시범을 보이며 태권도를 설명하고 한국을 알렸다. 당연 인기 만점이었고 성적도 다들 A를 받았다.
주제발표 시간만 되면 나에게 와서 개인시범훈련이나 자료를 요청한다. 대학생 녀석들은 아예 나를 모셔(?)다가 함께 시범을 했다. 주제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오면 가산점이 붙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학 강단에 서보기(?)도 했다. 태권도는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았다. 국제 문화 교류나 학교, 사회단체 등의 초청으로 한국 문화 알리기 시범이 잦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어필이 강했다. 당연 인기 최고였고 우리 아이들이 관객들의 싸인 공세에 스타가 되기도 했다. 우린 단순히 한글학교 학생이 아니라 한국 문화 사절단 역할을 했다. 덕분에 한글학교 업무 전체를 담당하던 나는 대외활동으로 쉴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정규 사범 wtkd@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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