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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19>주세붕이 성리학 선구 안향을 기려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11.07 10:47
  • 호수 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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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紹修書院) -1]

 소백산 남쪽 폐허 같이 남아있는 옛 고을 ‘순흥’에
 ‘죽계수’는 서늘할 만큼 콸콸 흘러 흰구름만 쌓이네
 인재를 길러 유도를 높이니 그 공적 참으로 원대하고
 사당을 세워 선현을 기림은 일찌기 없었던 일 아닌가
 성현의 큰 덕을 경모하여 뛰어난 인물들이 모여드니
 학문을 통해 인격을 갈고 닦음은 벼슬하기 위함 아니라네
 옛 어진 분을 뵌 일이 없으니 마음조차 뵙기도 망설일 뿐
 ‘방지’(연못) 속에 비치는 달빛만 얼음 같이 차구나
                                   <이퇴계의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에 배향(配享)된 공자의 조상(彫像)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원래 이름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조선 중종 때 풍기(豊基)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인 고려시대의 안향(安珦)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몇 년 뒤 퇴계가 군수로 부임한 다음 나라에 상소를 올려, 명종으로부터 서적  노비  토지와 함께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음으로써 이른바 사액서원(賜額書院)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이제 이 나라 서원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소수서원을 찾기 위해 영주(榮州)로 발길을 돌린다. 도산서원과 그 언저리에서 더 알아보고 싶은 일들이 있어 상당한 미련을 남기고 떠나려는데 퇴계 선생께서 나직한 음성으로 다정하게 부른다.

 

 “좀 더 있다 가지, 벌써 떠나려는가?”
 “저도 그러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알아보고 싶은 건 모두 확인해 보았는가?”
 “눈에 보이는 것은 대략 둘러보았으나 궁금한 게 아직 많습니다. 선생님께서 과거(科擧)에 세 차례나 낙방하신 이유, 단양 기생 두향(杜香) 아가씨와의 염문설(艶聞說)이 궁금하고요, 선생님의 종택(宗宅)과 후손되시는 이육사(李陸史)의 박물관에 가보았으나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분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허허, 두향과의 염문 등에 관해서는 고려대의 정석태 박사에게 물어보게나.”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사실무근이라고요. 그러나 다른 관계자들의 주장처럼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게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데요.”

 서원을 제대로 알려면 소수서원을 알아야 하고, 소수서원을 알기 위해서는 고려시대의 학자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을 알아야 한다.

 회헌은 고려 고종 30년(1243),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順興面)에서 태어났다. 원명 안향 대신 안유(安裕)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조 초기 임금인 문종의 이름이 역시 향(珦)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바꿔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소수서원에 배향(配享)된 안향의 조상(彫像)
권위 있는 학자들이 만든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이지만 좀 이상하다. 두 분의 탄생 연도를 비교할 때 안향이 1백70년 정도 앞서는데 한참 뒤에 태어난 문종 때문에 어찌 이름을 바꿔 부른단 말인가? 더구나 왕조가 다르고, 성(姓)도 다른 인물들이므로 바꿔 부를 수도 없을 것이고 억지로 바꾼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안향의 첫 이름[初名]이 ‘안유’라고 되어있어 필자의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아, 그게 아니라면 고려시대의 임금 중에서도 문종이 있었으니 그분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문종의 이름이 역시 향(珦)이어야 한다. 고려사를 뒤져보니 문종의 이름은 휘(徽), 자(字)는 촉유(燭幽)였다. 이 경우 또한 아니다. 설령 문종의 원명이 휘가 아니고 향이었다 하더라도 안향보다 2백년 이상 앞선 인물이니 명칭 시비가 생기는 게 어색하다.

 회헌 안향이 살던 13세기 고려의 사정은 어땠던가. 밖으로는 거란  몽고  홍건적  왜구 등 외세의 침략이 있었고, 안으로는 최씨 무인정권(武人政權)과 불교계의 타락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다. 따라서 고려왕조의 통치기반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이념, 새로운 사상의 도입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 안향은 충렬왕 15년(1289) 임금과 공주 일행을 수행하고 원(元)나라에 들어갔다가 연경(燕京)에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접하게 되고 크게 기뻐하여 이를 유학(儒學)의 정통이라 평가하고 가지고 돌아와 보급한다. 이듬해(1290) 3월 귀국할 때까지 그는 손수 책을 베껴 쓰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가지고 돌아왔다.

 귀국 후 본인 자신이 주자학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진흥재단을 설립하고 필요한 시설 마련에도 힘썼다. 뿐만 아니라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파견, 보다 많은 서적과 제사에 필요한 기물들을 구해오게 하여 주자학 보급의 수준과 지경을 넓혀나갔다.

 “만년(晩年)에는 회암(晦庵) 선생(주자)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경모(敬慕)하였으며, 주자의 호를 본따 자신도 회헌(晦軒)이라 하였다.”
(고려사 권 105 열전 안향전)

 

   
소수서원에 배향(配享)된 퇴계 이황의 조상(彫像)
이쯤에서 평소 끊임없이 목구멍을 간지럽히던 쓴소리를 뱉어내야겠다. 유교의 명칭에 관한 문제.

 

 우리나라 사람 중에 ‘유교(儒敎)’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중국 고대의 공자(孔子)가 주장한 유학을 받드는 교”라고 되어있다. 학문(유학)이 종교가 되는 것은 물이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흐르는 게 이상한 것처럼 어색하나 그건 접어두더라도 유교를 설명한 사전적 풀이 뒤에 ‘명교(名敎)’ 또는 ‘공교(孔敎)’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부터가 번거롭다. 그러나 이건 시작이다.

 유학을 중심에 놓고 볼 때,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 ‘주자성리학’ 그냥 ‘성리학’ ‘국학’ ‘정주성리학’ ‘송학(宋學)’ ‘이학(理學)’ ‘의리학(義理學)’ ‘심학(心學)’ 등은 무엇인가. 결국은 하나요, 같은 것인데 이와 같이 다양하게, 정신없이 복잡하게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인 좁은 소견으로는 유학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추상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으면 ‘포괄적’이라 해도 좋다. 아무튼 이런 특성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개념의 정립마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여져서 이처럼 복잡해졌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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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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