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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18>퇴계 학덕 기려 제자들이 서원 건립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10.30 20:22
  • 호수 744
  • 댓글 0

[도산서원(陶山書院) -5]
 

 세상은 많이 변했다. 지금도 다양하게 변해 가고 있다. 변화의 양상 중 하나가 사람의 수명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역사를 뒤적이다 보면 많은 인재들이 65세 이전에 세상을 떠난 사실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게 된다. 요즈음은 어떤가. 70세쯤 된 사람들은 노인 대접을 못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80은 돼야 노인이요, 90 이상이 돼서 세상을 떠나야 천명(天命)을 다했다고 여긴다던가. 물론 통계학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감각적인 평가일 뿐이다.

 

   
도서관 기능을 가진 광명실
퇴계는 만 70세에 입명(立命)했으니 옛날의 기준으로는 비교적 장수한 셈이다. 1501년 11월 25일에 태어나 1570년 12월 8일 도산서당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대학자 퇴계다운 마지막이었다. 그날 아침 측근의 부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고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지시한 다음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오후에 앉은 자세 그대로 운명했다고 한다.

 3년상을 마치고 나서 제자들은 선생을 모실 사당과 그분의 학문을 이어받을 서원을 짓기로 합의하고 서당 뒤쪽 산을 깎아 공사를 펼쳤다. 1575년에 완공. 서당 옆을 넓혀 서원을 지은 것은 좋은 판단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곳은 깔끔한 성격의 퇴계 선생이 세 차례나 장소를 옮겨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인 만큼 그분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에서 적지(適地)이고 객관적으로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선생이 이곳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던가. 그가 남긴 시들을 살펴보면 그 마음을 절절이 읽을 수 있다.

  < 안개 낀 숲 · 烟林 >
 아무리 읊어도 흥 다하지 못하고
 그림으로도 변화 다 그려내지 못하네
 봄 짙으면 꽃들 수(繡)처럼 엇섞이고
 가을 깊으면 노을 속 경치 현란하네
 
 먼 곳이나 가까운 곳 모두 기세 어울리고
 자욱한 안개 속 나무들 막막(漠漠)하네
 목 늘여 바라보니 즐거운 마음 넘쳐
 아침저녁 그 모습 변화 실로 다양하네

 < 눈 쌓인 오솔길 · 雪徑 >
 기슭의 골짜기 하얗고 돌비탈 오솔길 아득하네
 옥 자취 밟으며 누가 먼저 찾아줄까
 저 아래 강을 따라 한 줄기 오솔길
 높아졌다 낮아졌다 끊어진 듯 돌아가네
 온통 쌓인 눈, 사람 자취 없는데
 저 멀리 구름 바깥에서 승려 하나 걸어오네

 퇴계는 서당 주변의 산, 들판, 강에 관하여 세밀하고도 다양하게 많은 시를 남겼다. 그만큼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동과 서의 취병산, 남쪽의 부용봉, 남쪽 기슭(西麓), 또 동녘의 취미산, 서쪽 언덕길로 오르는 요랑산, 먼 산, 흙성[土城], 어촌, 갈매기 모래톱, 아득한 들판(長郊), 강 속에 누워있는 커다란 돌 반타석, 남쪽 물가, 낚시터, 학 물가(鶴汀), 꽃 섬돌 등. 그리고 꽃과 대나무, 매화 등을 노래한 것들과 특별히 서당 부근을 시리즈로 읊은 ‘도산 12곡’도 있다. 
 
 

   
서원의 핵심 강학 공간인 전교당
서당 뒤편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진도문(進道門)을 통과하게 되고, 서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강학(講學) 공간이 손님을 맞이한다.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동·서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동편은 박약재(博約齋), 서편은 홍의재(弘毅齋)라 한다. 박약(博約)은 ‘학문을 넓히고 예를 지키라’는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줄임말로서 논어에서 따왔고, 홍의(弘毅)는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굳세고 떳떳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 안쪽 가운데에 학문을 강의하던 대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이 품격을 갖추고 앉아 있다.

 그 뒤의 삼문 오른쪽 깊숙한 곳에 각종 책의 원고라 할 수 있는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판각이 귀중한 자료들을 모두 다른 곳에 넘겨주어서인지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선조의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언행록, 병서(屛書), 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다가 2003년에 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다 한다. 삼문 안쪽으로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 상덕사와 부속 건물 전사청. 왼쪽에는 서원 관리인들의 살림집인 위·아래 고직사(庫直舍).
 
 도산서원을 보고나서 느낀 점. 건물이 많고 기능이 다양하며, 명성에 걸맞게 위엄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한마디로 좀 어수선하고 답답하다. 꼼꼼하게 보지 않고서는 뭐가 뭔지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왜 그렇게 느껴질까. 필자만 아둔하여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서원 건축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니, 서당과 서원 본 건물이 따로 따로 지어진 이후 네 차례의 증축 (①역락서재,  ②동 광명실·1819년,  ③서 광명실·1930년,  ④유물전시관인 옥진각·1970년)과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전체적인 통일성과 조화보다는 기능을 그때그때 부여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료보관소였던 장판각
가장 눈에 거슬리는 건물은 서원 한복판에 있는 진도문과 좌우의 광명실. 우선 진도문은 정문에 그 기능을 넘겨주고 아예 짓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이며 두 광명실은 도서관이므로 어디 깊숙한 지역에 별도로 지어졌더라면 중심부가 널찍하여 숨통이 트였을 것이다. 그 빈자리에 병산서원의 만대루와 같이 자연경관을 시원스레 조망할 수 있는 누각을 세웠더라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유물전시관인 옥진각(玉振閣). 그걸 무엇하러 그 자리에 세웠는지 아쉬움이 크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고 옹색한데, 하고직사(下庫直舍) 농운정사가 위아래로 딱 붙어있는 밀집지역에 큰 규모의 전시관을 현대식으로 바짝 붙여 지어 놓으니 답답하기 그지없고 조화마저 깨져 관람의 막바지가 불쾌하게 일그러졌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 식의 전시관이라면 서원에서 좀 떨어진 별개 지역에 따로 지었어야 옳다. 옥진각과 같은 건물을 다른 장소에 다른 목적으로 세워 놓았다면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때 지어진 도산서원에 현대식도 아니고 현대식이 아닌 것도 아닌 이상스런 건물이 끼어 있으니 얼마나 어색하고 밉게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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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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