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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⑮정조 특명으로 별시 치르기도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10.02 16:50
  • 호수 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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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陶山書院) -2]

서원 앞마당은 넓다. 건물 맞은편 강쪽의 마당 끝은 절벽. 퇴계는 그 동편을 천연대(天淵臺), 서편을 운영대(雲影臺)라 이름지었다. 경치가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천연대.
천연대는 시경의 후반부인 대아(大雅)편 ‘보아라 한산(旱山)의 기슭’ 이라는 시에서 따왔다.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앞 다투어 뛰노네. 외모가 단정하고 심성 온화하신 님께선/ 어찌 인재를 양성하지 않으시리. (필자 번역)

鳶飛戾天(연비려천) 魚躍于淵(어약우연) 豈弟君子(개제군자) 遐不作人(하부작인)
이 시의 첫째 줄과 둘째 줄의 끝 글자를 따서 ‘천연대’라 지었다.

 운영대는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의 “천광운영 공배회 (天光雲影共徘徊)” 즉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돌고 돌다’에서 구름 그림자를 취했다. 구름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 어디일까. 잔잔한 연못이다. 물 위에 비친 파아란 하늘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같이 움직이는 맑은 서정(抒情), 퇴계에게 퍽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천연대나 운영대 모두 천지간의 신묘(神妙)한 작용을 깊이깊이 생각하고, 자연의 심오한 참뜻을 깨우치기 위한 분위기 조성용 무대장치라는 느낌이 든다.

 서원 앞마당에서 낙동강 쪽을 바라보면 유난히 눈길을 끄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낙동강’이라고 불렀지만 이곳의 강(江)은 강이자 호수이다. 안동댐의 수문을 막아 물을 채우면 호수가 되고 물을 빼면 강이 된다.

 호수일 때의 그 작은 섬은 윗부분만 보이고 강일 때의 섬은 전체가 보인다. 시사단(試士壇)이라는 곳이다. 조선시대 정조 때 과거시험을 실시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원 앞에 세운 작은 비각. 이렇게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대단치 않은, 보일락 말락한 역사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시사단
그러나 그 배경을 잘 들여다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일들이 깔려 있음을 알게 된다. 자세히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무척 길어질 것이다. 가능한 짧게 줄여보겠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조가 즉위했을 때 조정은 노론(老論)의 철저한 독무대. 그야말로 일당독재 체제여서 나라의 운영은 편향적일 수   밖에 없었다. 견제세력이 되어 주어야 할 남인과 소론은 몰락하여 겨우 가냘픈 숨을 유지하거나,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힘없고 불규칙한 맥박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남인으로는 번암 채제공(蔡濟恭) 한 사람이 조정에 남아 있었고, 소론은 영조 4년에 발생한 ‘이인좌(李麟佐)의 난’과 역시 영조 31년의 ‘나주 벽서사건’으로 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거나 설 자리를 빼앗겨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긴 세월을 그렇게들 지냈다.

 그러다 정조의 등극을 계기로 깊은 그늘에 가려 있던 두 세력은 회생의 활로를 뚫어 보려 했다. 소론이 선수를 날렸다. ‘사도세자 문제’를 들고 나와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패착(敗着). 전체적인 판세와 정조의 입장을 예리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저지른 너무 성급한 공격이었다. 관련자들 여러 명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재위 10수년이 흘렀을 때, 정조는 이미 풋내기가 아니었음에도 집권세력 노론은 오만과 독선의 자리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왕명에 불복, 정면으로 거부하는 강수(强手)를 두었다. 그것도 두 차례나. 이것이 정조를 격분케 했다.

 그 결과 재위 16년 3월 정조는 도산서원에서 별시(別試)를 치르게 했다. 별시는 글자 그대로 특별 과거시험.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임시로 실시하던 것으로 서울에서만 치러졌다.

 지방에서 실시한 것도 파격이었지만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노론 이외의 영남 선비들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마저 사실상 박탈하고 있던 터였다. 따라서 난(亂)이후 65년 만에 영남 선비들이 복권되는 순간이었다. 노론의 독선과 횡포에 맞설 수 있는 견제 세력을 양성하려는 정조의 강한 의지가 담긴 조치였다.

 별시장에 입장한 유생이 7,200여명, 답안지[試券]를 낸 사람이 3,632명이었다고 한다. 구경꾼까지 합치면 1만명이 훨씬 넘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되자 서원에서는 시험을 치를 수 없어 과장(科場)을 강변으로 옮기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답안지는 밀봉하여 서울로 가져와 정조가 직접 채점했다. 채점 결과는 자료마다 조금씩 달라 합격자의 수가 11명, 7명으로 차이가 나고, 강세백(姜世白)과 김희락(金熙洛)만 합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그 일을 기리기 위해 단을 쌓고 기념비를 세우니 그게 바로 시사단이다. 지난 1976년 안동댐 건립으로 인해 물에 잠길 처지에 놓이자 높이 10미터의 둥근 축대를 쌓고 비각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서원 앞뜰에 버티고 서 있는 엄청난 크기의 왕버들
서원 앞마당을 둘러볼 때 가장 두르러지게 눈길을 끄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 대구 도동서원 앞에서 만났던 거목 ‘김굉필 은행나무’와 비슷한 인상을 풍기는 왕버들 두 그루와 벚나무 등. 큰 나무들은 모두 저런 모양으로 성장하고 늙어 가는가. 굵은 가지가 지면과 평행을 이루며 물결치듯 낮게 뻗어나가 집채만 한 크기가 되었다.

 3백년 이상 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설명이 없다. 다른 서원과는 비교도 안 되게 보여줄 건물과 유물이 많아 그까짓 나무 따위야 낄 틈이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구조물 등은, 관리만 잘 하면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없지만 나무들은 시간이 지난만큼 크기와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서원의 연륜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너는 나설 것 없다’고 그늘진 구석으로 밀려나는 콩쥐나 신데렐라가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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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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