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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⑪나라를 구한 서애(西厓)의 혜안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08.28 22:09
  • 호수 737
  • 댓글 0

[병산서원(屛山書院) -3]

 

   
서애 유성룡의 모습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모시는 서원이다. 그분의 호 ‘西厓’는 서쪽 언덕이라는 간단한 뜻이나 발음이 아름답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찾아가 자세히 살펴보면서 서애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보람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서애야말로 충무공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은인이다. 서애가 없었더라면 이순신도 없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충무공 개인에게만 은인이 아니고 이 나라 조선에게도 은인이었던 셈이다.

 나이로 따지면 두 사람이 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벼슬로는 거의 하늘과 땅이었다. 선조 24년(1591) 정1품 좌의정이던 서애는 종6품 정읍 현감이던 11계급 아래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수사로, 형조 정랑이던 권율을 의주 목사(牧使)로 각각 승진시켜 주었다. 임진왜란을 한 해 앞두고 바다와 육지에서 영원히 기록될 명장들을 탄생시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과 권율은 잘 기억하면서도 서애 유성룡에 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그 점이 좀 아쉬워 서가(書架)에서 오래 잠자고 있던 서애의 저서 징비록(懲毖錄)을 다시 꺼내 보았다. 단기 4293년이니까 1960년에 발간된 책이다. 징비록 자체야 정유재란이 끝난 후 1600년대 초에 쓰인 것이지만, 360년 뒤 이재호(李載浩)라는 분이 주석을 달고 풀이하여 놓은 주해서(註解書).

   
징비록에 쓰여있는 서애 유성룡의 친필
징비록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제사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일반적으로 제사는 고조부(高祖父)까지 4대를 모시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제사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영원히 위패를 옮기지 않고 모시는 것을 승인해 주었다. 일종의 허가제인 셈이다. 이를 ‘불천위(不遷位)’라 한다.

이 불천위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이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안동 일원에 많이 집중되어 있다. 그 면면들을 훑어보다가 ‘학봉 김성일’이란 이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불천위가 특별히 나라에서 엄격하게 심사해서 승인해주는 것이라면 학봉이 끼어 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학봉 김성일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이태 전(선조 23년)에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낌새가 없더라”고 보고함으로써 4백여 년 동안 욕을 먹어오며 역사의 죄인으로 찍혀있는 인물이다. 그런 김성일을 국가에서 불천위의 대상으로 승인해 주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의물을 풀어줄 수도 있는 힌트가 징비록에 군데군데 박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첨지(僉知) 황윤길이 상사(上使)로, 사성(司成) 김성일이 부사(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징비록의 기록을 보자.

“그들이 대마도에 머물러 있을 때 평의지(平義智 ? 대마도주)가 사신을 청하여 절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의지가 교자를 탄 채로 문안으로 들어와 섬돌에 이르러서야 내렸다. 이를 본 김성일이 노하여 말하기를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번신(藩臣 ? 울타리 같은 변방의 신하 ? 필자 해석)이다.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왔는데, 어찌 감히 오만하게 업신여김이 이와 같으냐? 나는 이런 잔치는 받을 수 없다’ 하고는 곧 일어나서 나오니 허성(許筬 ? 서장관) 등도 잇따라 나와 버렸다. 이러자 의지는 그 허물을 가마를 멘 사람에게 돌려 그 사람을 죽여 그 머리를 받들고 와서 사과하였다. 이로부터 왜인들은 김성일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그를 대접함에 예를 더 극진히 하며 멀리 보이기만 해도 말에서 내렸다.”

 뒤에 또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 사신이 장차 돌아오려 할 때, 답서를 마련하지 않고 먼저 떠나라고 했다. 김성일이 말하기를 ‘우리는 사신이 되어 국서(國書)를 받들고 왔는데, 만약 회보하는 글이 없다면 이것은 왕명을 풀밭에 버리는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

상사 황윤길은 더 머물라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갑자기 떠나 바닷가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으니 그제서야 답서가 왔다. 그러나 그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여 우리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김성일은 이를 받지 않고 몇 차례를 고쳐 써 오게 한 연후에야 가지고 떠났다. 지나는 곳마다 여러 왜인들이 선물을 주었으나 김성일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귀국하여 두 사신은 서로 상반되는 보고를 했다. 이에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兵禍)가 있으면 장차 어찌 하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도 역시 어찌 왜(倭)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황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해 할 것 같아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고 하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중학교 때 역사 시간 이후 그에 대하여 지녀 왔던 나쁜 감정이 징비록을 꼼꼼히 읽는 사이에 상당히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 담력과 기개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지금도 대마도에는 학봉을 기리는 커다란 비석이 남아 있다고 하며, 안동시청에서 북쪽으로 3km쯤 가면 학봉을 불천위로 모시는 의성 김씨 종택이 기품있게 자리잡고 있다.

다만 기개가 너무 충만한 나머지 독단과 독선이 두드러져, 엄연히 상사(上使)가 있는데도 중요한 결정을 혼자서 내려버린다든지 이성보다는 감정을 앞세우는 점 등은 국가적인 큰일이나 조직생활에서는 좀 아쉬운 측면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에 다녀와서 보고했던 내용만 하더라도 황윤길의 보고가 중앙과 지방, 즉 온 나라를 혼란과 공포로 들끓게 할 수도 있다는 염려가 있어서 그렇게 반대로 보고했다고 하지만 본인 말마따나 일본의 향후 움직임이 당시로서는 가부간에 단언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다면 ‘일본의 침략을 속단하기는 어려우니 너무 혼란스럽게 대처하지 말고 조용한 가운데 일단 대비는 해나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는 정도로 원만하게 처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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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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