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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⑦억울한 죽음에 두 차례 사액(賜額)
[도동서원(道東書院) (3)]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07.24 17:39
  • 호수 733
  • 댓글 0

도동서원은 낙동강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대니산 기슭에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북향(北向)이다. 대니산은 오른쪽, 즉 동편에 있다.

‘대니산’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좀 경망스런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Danny Boy)'를 떠올렸다. 심금을 울리는 맑고 깨끗한 선율, 가을 날씨처럼 애잔한 가락.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면서 다시 못 볼 것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쓰라린 마음이 산골짜기로 흐르는 노래.
 
본인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고, 보는 이들은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 없는 한훤당(寒暄堂)의 삶이 ‘대니 보이’의 정서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무래도 산 이름에서 마음이 떠나지를 않아 해설하는 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니가 물론 영어는 아닐 테고, 무슨 뜻인가요?”
“절[寺]을 이고 있다는 뜻이랍니다”

니(尼)가 여승을 뜻하는 말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대니산에 절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고 정수암이라는 암자가 있으니 그걸 말하는가? 좀 이상하다. 본래 이 산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다가 한훤당이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대니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데 절과 연계시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도동서원을 눈앞에 둔 지점에서 이정표가  서원과 대니산 방향을 알려 주고 있다.
그렇다면 혹시 공자(孔子)와 연결된 게 아닐까? 공자의 존칭이 니부(尼父)이니 머리에 인다는 뜻의 대(戴)와 합쳐 대니산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유홍준(兪弘濬)도 그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그렇게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훤당을 모신 서원은 원래 대니산 넘어 더 동쪽으로 비슬산 기슭에 있었다. 선조 2년(1568년) 퇴계 이황과 한훤당의 외증손자 정구(鄭逑)가 쌍계리 쪽에 서원을 세우고 5년 뒤 선조임금으로부터 ‘쌍계서원’이라는 현판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30년쯤 뒤 임진왜란 끝 무렵에 불타 없어지고 선조 37년(1604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잠시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고 불렸으나 선조에 의해 ‘도동서원’이라 사액(賜額)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동네 이름도 도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슬그머니 또 화가 솟는다/ 나무랄 데 없이 고결하게 살던 당대 최고의 선비를/ 단순히 점필재(店畢齋)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로/ 중죄인의 낙인찍어/ 머나먼 북녘으로 보내면서 곤장 80대/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도/ 한 번에 40대 이상은 때릴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한 나라도 있다는데/ 연약한 선비의 몸에 80대라니/

살벌한 공기를 가르며 야멸차게 떨어지는 매타작의 둔탁음/ 무정하게 박자를 맞추며 매의 대수를 세는 새된 소리/ 서로 꼬이며 궁궐 지붕위로 솟아오르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형틀에 묶여/ 고통을 받아내느라 인내의 한계를 넘나들며/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듯 뱉어내는/ 한훤당의 신음소리 형장 바닥에 깔리고/ 너덜너덜해진 몸을 천리길 평안도로 원방부처(遠方付處)/

간악한 무리들 또 무슨 악심 품었는지/ 남쪽 끝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하니/ 손발 묶이고 함거(?車)에 실려 수천리길 터덜터덜/ 그 고통과 억울함, 모멸감은 곤장 못지않았을 터/ 그것도 모자라 4년 뒤엔 목숨마저 앗아가니/ 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정치로고/ 이 세상 대사건의 역사는 범죄사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볼테르의 말은 정신나간 소리인가/

그렇게 죽였으면 자손 대대로 변함없이/ 죄인으로 남겨두지 무엇하러 세월 지나/ 벼슬 주고 시호(諡號) 내려 병 주고 약 주는가/ 그래도 마음에 빚이 남았던지/ 한 번도 어려운 사액을 두 번씩이나 인심쓰고/

고약한 연산군은 성종의 장남이고/ 다음 임금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 동생/ 이어지는 인종 명종은 중종의 장?차남/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니/ 5대 임금이 할아버지 손자 사이로 묶여 있어/ 서로를 챙기는 마음 각별해서 그랬던가/ 연산군이 저지른 일 후대에서 봉합하네 /

그렇다고 지하의 한훤당이 성은 망극 외치면서/ 소리높여 감동하고 좋아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었을까/ 그건 모두 떠난 분에겐 아무 소용없는 허사일 뿐/ 살아 있는 자들에게나 필요할지 모르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

점필재와 한훤당, 스승 제자 분명하나/ 하나의 도당(徒黨)이라 꾸러미로 묶으려면/ 조금만 정성들여 알아나 볼 일이지/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明行錄) 일별만 했더라면/ 두 분이 학문의 방향과 철학이 달라/ 결별한지 오랜 것을 너무 쉽게 알아차려/ 두고두고 욕먹을 짓 저지르지 않았을 터/

생각하면 할수록 애달픈 사연인데/ 그의 이름[號] 떠올리면 사람에게 운명이 과연 있는 건가/ 한훤당, 살아서는 철저히 한(寒)이요, 죽어서는 계속 훤(暄)이니/ 어찌 그리 긴 세월을 꿰뚫 듯 내다보고/ 본인이 지었는가 명인이 지어 주었는가 /

   
김굉필 선생 500주기 추모비
반세기 전 학창시절 혼자서 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가장 존경받을 만한 철학자는 역시 소크라테스’라는 게 공부의 끝에 얻은 결론. 이유는 분명하다. 소크라테스야말로 그의 말과 생각과 행실이 확연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철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지 않았던가.

한훤당의 삶이 비슷하다. 23살 위인 점필재(店畢齋)의 문하생이 되어 소학을 배우면서 이에 심취, 책에서 가르치는 대로 철저히 실천했다.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은 30세쯤부터 섭렵. 저 유명한 퇴계조차도 한훤당을 가리켜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 즉 우리나라 도학의 대종이라 했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인물들이 많았다. 일일이 나열할 것도 없이 당대 최고의 학자들은 모두 그의 벗이었거나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도동서원 이외에도 전남과 경북의 현존하는 여러 서원들이 한훤당을 배향하고 있다. 전남 순천의 옥천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화순의 해망서원, 경북 상주의 도남서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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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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