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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⑥‘공자의 도, 동쪽에 이르러 꽃피다’
[도동서원(道東書院) (2)]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07.18 10:08
  • 호수 732
  • 댓글 0

서원 이름 ‘도동’에는 무슨 현묘(玄妙)한 뜻이 있는 것인가. 한자(漢字)로는 어떻게 쓸까. 틀림없이 철학적으로 무슨 좋은 뜻이 있을 텐데 얼른 짐작되는 바가 떠오르지 않아 내심 무척 궁금했다. 상당히 기대도 되었고.

그러다 팍팍한 벌판길을 걸으며 처음 발견한 한자(漢字) 이름 ‘道東(도동)’을 대하고는 저으기 실망. 동쪽에 있는 도? 도의 동편? 무척 싱겁군!

그러나 알고 보니 공자의 도가 동쪽에 이르러 꽃피었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그럴듯하다.

 

   
도동서원 이정표
아무튼 도동서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여기에 배향(配享)되어 있는 서원의 주인공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알아야 한다. 한훤당은 참 특이한 이름[號]이다. 뜻이 묘(妙)하다.

 

‘한(寒)’은 춥다 차다 떨리다[戰慄] 뼈에 사무치다 쓸쓸하다 추워서 얼다 가난하다의 뜻. 이에 반해 ‘훤(喧)’은 따뜻하다 따스하다의 의미. 냉탕과 온탕이 함께 차려져 있는 사우나를 연상시킨다. 사우나를 적절히 잘 하면 혈액순환이 좋아져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러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삶은 한(寒)과 훤(喧)이 조화를 이루고 냉(冷)과 온(溫)이 상승작용을 하여, 자신의 본명처럼 본인도 굉장(宏壯)히 행복하고 사회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던[弼] 것이 못 되었다. 그 책임이 한훤당 본인에게 있었던 게 아니다. 더러운 정치의 희생양이 된 것뿐이다.

김굉필은 단종 2년(1454년) 사용(司勇) 유(紐)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용은 정9품의 하급관리.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는 기록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증조부가 예조 참의를 지냈는데 현풍 곽씨와 결혼, 처가인 현풍에 내려가 살면서 현풍 사람이 되었고, 조부가 서울로 이주함에 따라 정동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26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별로 인정받지 못한 채 낮은 관직에서 머물다가 무오사화가 일어날 무렵, 44세가 되어서야 겨우 형조 좌랑에 올랐다.

무오사화(戊午士禍). 조선조 역사의 큰 얼룩들이라 할 수 있는 4대 사화의 첫 머리. 왜 그와 같은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이 역사의 강을 추하게 오염시켰는가.
 
세조시대 이후 권세를 누려온 기득권 그룹(훈구파 ㆍ 勳舊派)과 성종 때부터 등장한 신진 학자들 (사림파 ㆍ 士林派)은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달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사림파는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小人輩)’라 하며 무시했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고 업신여겼다.

서로를 아주 미워하며 티격태격하던 이들의 대립은 문제의 연산군 4년(1498) 마침내 폭발점을 찾기에 이르렀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이 벌어졌다. 사림파의 우두머리인 김종직(金宗直)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지은 적이 있었다. “꿈에 옛날 중국의 초(楚)나라 회왕(懷王)이 나타나 자신이 초패왕 항우(項羽)에게 살해돼 강물에 버려졌노라고 하소연했다. 회왕과 자신(김종직)은 시기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이 특이하여 글을 남긴다”는 간단한 내용.

 

   
순천 옥천동의 임청대(臨淸臺). 김굉필이 귀양살이 중 소일하며 돌을 쌓았던 곳에 명종 때의 부사 이정(李楨)이 추모의 뜻으로 임청대를 세웠다.
역사는 가끔 허망한 유희인가. T.S. 엘리엇은 ‘대성당의 살인’에서 “역사란 언제나 동떨어진 원인에서 기묘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대승정(大僧正)의 입을 빌어 말했다.

 

이 조의제문을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그게 무슨 역사적 사실이라고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이것을 훗날 성종실록 편찬 때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발견,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단순하게 초회왕의 고사를 거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단종을 조상(弔喪)하는 동시에 세조를 은근히 헐뜯은 것이라 하며 유자광과 함께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해바쳤다. 그것은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다.

이미 작고한 김종직은 관을 파헤치고 시체의 목을 베었고[剖棺斬屍], 김일손을 비롯한 5명은 사형, 정여창(鄭汝昌) 등 18명은 귀양, 문제를 일으킨 이극돈 등 5명은 파면. 이 때 모두가 그랬지만 아무 죄 없는 김굉필은 단순히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벼슬을 잃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의 유배지가 저 머나먼 평안도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옮겨져 가며 계속 죄 없는 죄인의 몸으로 살던 연산군 10년(1504), 무오사화보다 더 지독한 갑자사화가 일어나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불었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비(成宗妃)였던 윤씨의 폐사(廢死ㆍ 왕비의 자리에서 내쫒겼다가 죽임을 당함)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광분, 관련자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심지어 왕의 할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연산군의 포악한 행위를 나무라다가 병상에서 손자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

이성을 잃고 좌충우돌하던 연산군의 손에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韓明澮)를 비롯 8명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으며 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귀양살이 중이던 김굉필도 억울하게 삶의 종지부를 찍어야했다. 한창 나이인 51세였다.

6년 사이에 두 차례나 발생한 이 참극으로 성종시대에 양성한 많은 선비들이 수난을 당해 학계는 공황(恐慌)상태에 빠진 듯햇다. 이러한 역사의 파동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교훈을 안겨준다. 한 번씩밖에 부여되지 않은 이 소중한 삶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옳은 것인가!

김굉필은 그처럼 애석하게 세상을 떠났으나, 중종 2년에 억울함이 인정되어 도승지로, 선조 8년에는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아울러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속좁은 생각인 줄은 알지만, 이미 죽은 다음에 그까짓 이름뿐인 도승지는 무엇이며 영의정인들 무슨 소용이 있나! 문묘배향인들 당사자에게는 위로가 될 것인가. 후손들에게나 영광이라면 영광이라 할 수 있겠지.

김굉필 선생은 이론에 치우친 학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선비의 표본이었다. 학문이 경지에 오른 이후 오로지 소학(小學) 공부에만 치중, ‘소학동자’를 자칭하며 빈틈없이 바른 행동을 보여주었다. 소학은 생활전반에 걸쳐 실천해야 할 윤리를 가르치는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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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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