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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②퇴계사상에 영향준 큰 선비 이언적 배향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06.15 12:45
  • 호수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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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玉山書院) (2)]

   
이언적 선생의 신도비가 보존되어 있는 비각
“(앞부분 생략) 이에 문묘(文廟ㆍ성균관의 공자를 모신 사당)에 종사(從祀ㆍ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심)하여 제사를 받들면서 백세토록 사표(師表)로 삼게 하는 동시에, 40년 동안 고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응답하고 천만 세에 걸쳐 태평의 기업을 열 수 있도록 하리라 생각하였다.
이는 대체로 이만큼 기다릴 필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이니, 어찌 하늘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렇게 하겠는가.
이에 금년 9월 4일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다섯 현신을 문묘의 동무 (東廡ㆍ동쪽 행각)와 서무(西廡ㆍ)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아, 이로써 보는 이들을 용동(聳動 ㆍ 몸을 솟구쳐 춤추듯이 함)시키고, 새로운 기상을 진작시키려 하는데, 이 나라의 어진 대부들은 그 누구나 모두 상우(尙友 ㆍ 옛 현인을 벗으로 삼음)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고 우리 당의 문채(文采)나는 소자(小子)들은 영원히 본보기로 삼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이에 교시하는 바이니, 모두 잘 이해하리라 믿는 바이다.“

조선의 열다섯 번째 임금인 광해군이 재위 2년(1610) 9월에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오던 문묘종사 문제를 매듭짓고 이를 허락하는 교서(敎書)를 발표했다.

여기서 말하는 ‘문묘종사’란 무엇인가? 교서에 적시(摘示)된 5명의 유현(儒賢)들을 공자와 함께 제사지내는 일이다. 얼핏 생각하면 그게 어째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지 의아스럽다. 인물 선정이 잘 된 것 같으니 일단 시행하고 만일 추가해야 될 학자가 나타나면 그렇게 하면 될 텐데.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은 유교의 나라. ‘유교숭상’이 4대 국가시책에 들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대표적 유현(儒賢)을 뽑아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은 그 자체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뽑힌 분들의 사상은 나라의 지도이념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보아야 옳다.

   
신도비에 대한 설명문
당초 이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광해군은 ‘그 시행은 선왕께서도 어렵게 여겼다“며 결정을 유보하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조야(朝野)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요구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거세지자 결국 반년 만에 허락하고 만다.

이번에는 그 시행을 반대하는 상소가 나타났고, 무슨 소리냐 그대로 시행돼야 한다는 견해가 빗발쳤다.

역사의 들녘에 허망한 바람이 분다. 과연 역사가 무엇인가. 알려진 사실은 무엇이며 닫혀진 진실은 무엇인가. 그 들녘에 들풀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 간 수많은 인물들. 그들에 대한 평가가 모두 타당하고 올바른 것인가. 역사라는 기록에 왜곡은 없었으며, 악의적인 검은 손길들에 의해 아름다운 꽃이 아예 베어져 망각의 늪 속으로 내던져진 일은 없었던가.

아무튼 5현 선정에 고인이 된 조식(曹植)이 그의 수제자 정인홍을 통해 끼어들게 된다. 정인홍은 5현 가운데 이언적과 이황의 벼슬길을 거론하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주도한 척신정치가 횡행, 을사사화와 정미사화가 일어나 나라가 대단히 어지러웠던 명종 때 중요한 요직에 있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이에 반해 남명(南冥) 조식은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퇴했고, 상서원판관을 받아 사정전에서 명종을 직접 만났지만 치란(治亂)의 도리와 학문의 방법을 표(表)로 올리고 산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계속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특히 현감 직을 거절하는 사직 상소에서 그는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망해 천의(天意)가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다”고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렸으며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라고 시대의 금기까지 들먹였다.

남명선생이 벼슬을 철저히 고사한 것이 잘한 것이냐 아니냐의 평가는 접어두더라도 학자로서 양심에 따라 깨끗하게 처신한 것은 높이 인정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그가 문묘종사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아야한다. 따라서 조식을 포함하여 6현의 문묘종사로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퇴계 이황과 조식은 1501년생으로 동갑이며 이언적은 이 두 분보다 10년 선배. 아울러 세 분은 서로를 잘 알고 존중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조식에게 처음 벼슬길을 열어주려고 천거한 사람이 바로 이언적이었고, 이황도 정중하게 편지를 보내 환로(宦路)에 나올 것을 권유한 바 있다.

서원과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조선 중기의 역사책 갈피를 뒤져야 하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이 세분 모두가 우리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주요 서원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분 모두 사후에 영의정으로 나란히 추증(追贈)된 것도 흥미롭다.

   
서원 인근을 감싸고 흐르는 옥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이 분을 알아야 옥산서원이 보인다. 성종 22년(1491)에 태어나 명종 8년(1553)에 별세했다. 23세 때 을과에 급제, 인동현감 장령 밀양부사 등을 거쳐 39세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그 후 모략을 받아 쫓겨난 뒤 수년을 한가하게 지내다 복직,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전주부윤이 되어 일을 바르게 잘 함으로 경내가 두루 평안하였다. 공직에 있는 사이 국가대본과 정치 강령을 논하는 장문(長文)의 소(疏)를 올려 왕을 감탄시켜 크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벼슬이 예조참판 우찬성에 이르렀으나 1547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에 관련되어 억울하게 강계(江界)로 귀양 가서 6년 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62세. 이 벽서사건은 윤원로 윤원형 형제의 추악한 권력다툼이 빚어낸 것으로 죄 없는 사람들 여럿이 목숨을 잃었고 20여명이 유배를 당했다. 이것을 ‘정미사화(丁未士禍)’라 한다.

회재 선생은 사후 선조 때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 옥산서원에 배향(配享)됐다.
그는 조선조 전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퇴계 이황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옥산서원에서 해설자로 봉사하고 있는 가정주부 유모 씨는 회재 선생을 중점적으로 설명하면서 퇴계와의 관계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보였다.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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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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