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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문화의 뿌리 5대 서원을 찾아서-①옥산서원(玉山書院)-정갈한 수석, 책을 쌓은 듯
  • 최창신 고문
  • 승인 2011.06.06 12:06
  • 호수 727
  • 댓글 0

꼭 찾아가 보기로 작정한지 이미 오래 되었건만, 방문지(訪問地) 서원(書院)들과 연고가 있는 대학자(大學者)들의 사상이나 학문을 그 가장자리나마 알고 가야 한다며 시간을 끌었고 이런 사정 저런 핑계로 미루기만 해왔다.

   
서원 입구의 이팝나무 숲. 3백년 이상 되었다는 집채만한 거목들이 쌀밥처럼 흰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다.
5월 하순으로 접어드는 길목. 이때를 놓치면 내년 봄에나 또 기회가 오겠거니 싶어 무조건 떠나기로 결심. 새벽길을 서둘러 동서울 터미널에서 경주 경유 포항행 첫 차에 몸을 실었다.

의무적으로 안전벨트를 매고 의자에 묶인 채 4시간이 지나, 지루하다 싶은 느낌이 들 무렵 “경주에서 내리실 손님들은 여기서 모두 내리셔야 됩니다. 버스는 바로 떠납니다.”
얼떨결에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던져지다시피 내리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리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도 ‘옥산서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데는 없었다. 명색이 유명한 관광도시인데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니! 버스 노선은 30개나 되는데 이들 가운데 몇 번을 어디서 타야 되고 몇 분 간격으로 오는 것인지?

할 수 없이 맨투맨 전법. 터미널의 안내요원을 붙잡고 물었다.
“옥산서원은 어느 방향에 있고 몇 킬로미터나 됩니까?”
“? (무슨 이런 얼간이가 다 있어? 라고 생각하는 듯하다가) 그건 모르겠고, 멉니다.”
“? (무엇을 기준으로 멀다 하는지.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달려도 8분 15초가량 걸리는데 그런 천문학적 거리가 기준은 아닐 테고,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가 비교대상도 아닐 테고, 어처구니없다.) 그럼 걸어 갈 수는 없겠습니까?”
“걸어서는 못 갑니다.”

이런 식의 답답한 대화는 다른 관계자들이나 일반 승객들과도 판에 박은 듯 했다.
‘예’ ‘아니오’의 양자택일 사고방식, alternative.
갑자기 요술 빗자루를 타고 2진법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날아 간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터미널 안에서 버스들이 들고 나는 동태를 유심히 살펴  보니 여간 느린 게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버스들이 한가하게 서 있고 어쩌다 한 대씩 들어와도 금방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울의 버스 터미널과는 너무도 달랐다. 알레그로나 비바체의 질서에서 라르고의 세계로 차원(次元) 변경이라도 이루어진 듯,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있었다.

유일한 동반자 강승용 씨가 어느 핸섬한 버스기사에게 사정을 설명, 우리가 타야 될 버스는 203번이고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는 정확한 정보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옥색 물이 흐르는 인근 계곡. 둔덕이 마치 서책을 쌓은 듯 수석으로 정갈하게 덮여 있다.
203번은 북쪽 방향으로 경주 시내를 빠져나가 양동(良洞)마을에 들렀다가 안강(安慷)을 지나 우회전, 논밭 드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옥산서원으로 달렸다. 양동마을 근처에서부터 주위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희뿌연 연두색 꽃구름들이 군데군데 깔려 있었다. 아카시아 꽃무리.

수줍은 듯 잎 사이에 잔뜩 고개를 숙이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감추는 총상 꽃차례의 소녀 같은 모습들. 어릴 적 고향마을 친척 누이에게서 나던 향긋한 단내를 코끝에 실어다 주며 옛 추억을 헤집었고, 정지용의 ‘향수(鄕愁)’를 흥얼거리게 만들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 들어가는 숲길은 방문객들을 연초록 싱그러운 넓은 품 안에 오롯이 안아주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졌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학문의 바다 속에 자맥질해 보고 싶은 생각이 샘솟았다.

사실은 그 아름다운 풍광과 조용한 분위기에 초입(初入)부터 시원하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헤프지도 옹색하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계곡, 거기에는 인가(人家)가 지척이건만 마셔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의 맑은 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계곡을 지붕처럼 덮고 있는 나뭇잎의 초록빛이 물속에 잠기니 물은 파르라니 옥색(玉色).

계곡의 둔덕은 여느 바위나 흙더미가 아니었다. 정갈한 수석이 마치 책을 쌓아 놓은 듯 이어져 ‘서원(書院)’의 이미지를 단번에 고조시켰다.

숲은 이팝나무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팝나무의 수령(樹齡)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3백년 이상 되었다는, 그래서 집채만큼씩이나 큰 거목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꽃이 만발한 모습이 얼핏 눈이 잔뜩 쌓여있는 듯 보이지만 옛 사람들은 그게 하얀 쌀밥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옥빛 계곡과 이팝나무 숲을 지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옥산서원의 정문 역락문(亦樂門)
옛날 조선시대에는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이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삶이 궁핍하여 흰 꽃을 보고 쌀밥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정말로 눈보다는 쌀밥을 더 닮았는가.

흐드러지게 피어 넘치는 이팝나무 꽃들과 인근에서 흘러오는 여러 가지 꽃내음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에 들어가는 느낌. 여기서 공부하면 장원급제 했겠다!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등장하는 ‘오렌지꽃 향기에 신록은 짙어가고 종달새 우네’ 합창곡의 감미로운 선율이 귓가를 맴돌고 있는 착각에 젖어 안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절경 속 깊은 곳에 540년 연륜과 학문적 내공을 자랑하며 옥산서원은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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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신 상임고문.
최창신 본사 상임고문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 · 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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