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는 자식의 마음은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하다 보니 도장을 1~2주씩 비울 수가 없었다. 1983년 ‘한인태권도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자나 깨나 태권도 보급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프리카 가나공화국에서 전화가 왔다. 나의 송무관 친구 이영식(가명) 사범이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친지의 도움을 받아 가나공화국으로 임시방편으로 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가나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외국인의 안전보장이 안 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친구 걱정에 밤잠도 뒤로 한 채 해가 밝자마자 초청장을 급조하여 가나공화국 캐나다 대사관으로 보냈다. 초청장이 없으면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 시절이었다. 급송한 초청장 덕분에 일주일 후 이영식 사범을 토론토 공항에서 영접하게 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눈물이 앞을 가리고 이대로 함께 영원히 살기를 염원했다.

우리가 얼마나 절친했냐면 내가 먼저 캐나다에 이민 가서 자리 잡고 나면 친구를 초청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한국에서 태권도를 안주삼아 자주 술자리를 했던 우리는 도착한 날부터 매일 저녁 싼 위스키로 밤새는 줄 모르고 밀린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거의 10개월간 우리 식구와 동고동락하면서 이민수속을 준비하였다. 캐나다 이민수속을 할 때는 해외에 나가서 해야 하기에 캐나다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행을 선택하였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Columbus, Ohio)에 있는 최준표 사범에게 친구를 부탁했다.

최준표 사범은 양정중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송무관에서 누구도 그의 발차기를 따라 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였다. 또한 최 사범의 동생 최영표 사범도 꽤나 실력이 있어서 대단한 형제로 알려져 있었다. 최준표 사범은 미국에서 성공한 사범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 세 가족은 친구를 미국에 데려다 주고 빠른 재회를 약속하며 캐나다로 돌아왔다.

드디어 내게도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태권도장과 같은 건물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던 한국인 친구가 몸이 쇠약해져 가게를 더 꾸려갈 수 없다고 내게 인수할 것을 제안했다. 우리 가족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좋은 가격에 가게를 인수했다.

아침부터 아내와 같이 가게를 운영하고 오후에는 두 살배기 둘째 윤석이를 데리고 지하 도장으로 내려와 도장 청소를 시작하고 수련 준비를 하였다. 윤석이가 워낙 개구쟁이라 수련이 시작되면 사무실에 있지 않고 자기도 태권도를 하겠다고 도장으로 나왔다. 그러면 도복차림으로 윤석이를 재우려고 애를 썼다. 그때 내 모습이 수련생들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아이를 베이비시터(baby-sitter)에게 맡길 경제적 능력이 없으니 수련 도중 아이를 보는 태권도 사범이 될 수밖에...

자기 자본 없이 은행에서 대출한 돈으로 시작해 허리를 졸라매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10개월 만에 3만 달러란 거금을 저축할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니까 막상 돈 욕심이 더 생겨 토론토 변두리로 진출하여 건물을 구입하고 건물에 딸린 편의점과 식당을 함께 인수하였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시작했는데 시작한 시기가 추위가 매서운 1월이었기에 눈보라라도 몰아칠 때면 초저녁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캐나다는 북위권에 있어서 겨울에는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우리 부부는 창밖을 쳐다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이렇게 며칠을 지나고 있을 때 이웃동네 키치너(Kitchenor)에서 도장을 잘 운영하고 있던 오충원 사범이 우리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식구들과 함께 왔다. 음식을 한 상 주문하여 즐겁게 식사를 하며 우리 부부를 위로해 주었다.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찾아주고 도움을 준 사람이기에 평생 같이 가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당시 도매상이 토론토 근교에 밀집해 있어서 아침식사를 마치면 2시간씩 운전하여 토론토로 향했다. 밴(van)에 가게에서 팔 물건을 가득 싣고, 곧바로 도장으로 가서 수련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수련이 끝나면 형님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밤 10시경에 다시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운동을 마치고 밥을 잔뜩 먹은 후 운전대를 잡고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끝내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졸음운전을 하게 된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던가! 지금도 생각하면 팔등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 날이면 여지없이 갓길에 차를 세우고 몇 분간 잠을 자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렇게 집에 돌아오면 처는 아이들을 가게에 딸린 방에서 재우고 11시경 가게와 식당 문을 닫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애들을 하나 씩 업고 집이 있는 2층 계단으로 올라오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위스키 한 잔에 피곤한 몸을 맡겼다.

서정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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