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꽃피운 태권도 인생(2)

남철우 사범님이 추천하신 마곡사에 도착하여 원주(주지) 스님을 찾았으나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셨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태권도를 절에 보급하겠다는 꿈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니 썩은 무라도 베야겠다는 생각에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암자를 찾았다. 경치에 못지않게 이름도 아름다운 ‘은적암’이었다. 당시 절이나 암자에는 고시나 대학입시 재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기거하고 있었다. 은적암 주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방의 절이나 암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족히 열 명쯤은 돼 보였다. 도사가 되겠다고 온 사람은 나 하나였고, 흰 도복을 입고 하루에 세 번씩이나 산속을 뛰어다니며 수련을 하니 정신이 돈 사람이 하나 나타났고 주변에 소문이 퍼졌다.

하루는 근처 암자에서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과 공주 시내로 바람 쐬러 나갔다. 모처럼 고기에 막걸리도 한 잔 걸치고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공주에는 유명한 계룡산이 있는데 대전 유성 쪽에서 올라가면 ‘동학사’가 있고, 공주 쪽에서 올라가면 ‘갑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

나온 김에 갑사를 구경이 하자는 제안이 있어 절 구경을 하고 있는데 역기, 철봉대, 권고대(주먹 단련하는 기구) 등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그 곳 스님들께 어떤 분이 운동을 하시는지 물었다. 갑사에는 자칭 ‘달마대사’라는 주지 스님이 계신데 당수도 가르치고 축지법도 하신다고 답했다. 그 말에 귀가 확 열리며, ‘드디어 내가 도사를 만나 도사의 길을 가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당장 뵙기를 청하니 멀리 출타중이라 언제 돌아오실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기운이 다 빠진 상태로 은적암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암자에서는 석존제(부처님이 오시는 날)를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그때가 되면 사찰에는 행사 준비로 돈들이 꽤나 준비되어 있었다. 석존제가 시작되기 2주 전쯤 되는 밤이었다. 1시경 노스님이 내 방문을 두드리셨다. 법당에 강도가 들었다고 나보고 나와 보라는 것이었다.

그 때 남자라고는 나 하나만 있었다. 대검과 단봉을 들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적막하고 컴컴한 법당을 나 혼자 들어가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도들은 스님들 궤짝을 들고 도주한 후였다. 주변 밖을 샅샅이 살펴보니 숲 속에 궤짝을 버리고 안에 있던 옷은 펼쳐놓고 돈만 가져간 것이 발견되었다.

궤짝 주인인 스님은 절에서도 가장 가난한 공양 스님이었는데, 궤짝 앞에서 한참 동안 통곡을 했다. 간신히 달래 놓고 옷을 정리해 궤짝에 담고 있는데 옆에 2자루의 낫이 버려져 있었다. 주변은 칠흑같이 깜깜하고 갑자기 어디서 강도가 나타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섬뜩한 느낌은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라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잠도 뒤로 한 채 새벽 산을 뛰다시피 내려와 가까운 마을의 예비군 초소에 신고하였다. 그 날 밤 주변 사찰들이 송두리째 털렸다고 한다. 다행히 은적암만 큰 불상사가 없었다. 천만 다행이다 싶었다. 도를 닦는다고 온 산을 매일같이 설치고 다녔는데 강도까지 당했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은적암의 주지스님은 당시 36세의 여성이었다. 과거에 결혼에 실패하고 그곳에 입적하여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하는 원주스님이었다. 길에서 마주치면 뒤로 돌아서 내가 지나갈 때까지 서 있어서 여러모로 불편했었다. 한 번도 말을 건넨 적도 없었다.

어느 날 서울에서 계신 큰 형님에게서부터 편지가 왔다.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어머님이 매끼마다 밥상 위에 내 밥을 올려놓으신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은공도 모르는 자식이 된 것 같아 그날 밤에 짐을 쌌다. 아침 일찍 떠나려고 인사를 드리니 이제껏 한마디의 말도 하시지 않던 원주스님이 우시면서 가지 말고 자신들을 지켜 달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스님들도 사람이기에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약해지는 것은 세속 사람들과 같으리라! 난감한 마음을 은적암에 남긴 채 서울행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도착하니 형님은 나를 데리러 공주로 내려간 상태였다. 형님은 나와 불화를 일으켰던 사업을 조용히 정리하셨고, 나는 그후 몇 년간 종로 쪽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이미 39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은적암의 모습이 선하다. 한 번 돌아가서 은적암의 변한 모습도 보고 싶었지만 아직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만큼 은적암은 내 인생에 많은 변화를 준 곳이었다. 서울에 돌아와 노병직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가니 다시 도장에 나와 운동을 지도하라고 하셨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 다음날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송무관 본관으로 출근하였다.

서정길사범 tkdnews@korea.com

서정길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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