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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의 매화 꽃길 5백리(8)남원이 펼치는 운율
  • 최창신 고문
  • 승인 2009.06.08 11:37
  • 호수 640
  • 댓글 0

   
▲ 남원의 정취를 담고 있는 광한루
시인 황동규는 “개인의 기호에 관계없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詩) 한 편을 고르라면 T.S. 엘리엇의 ‘황무지’가 뽑힐 공산이 크다”고 말한다. 공감(共感)한다.

시(詩)는 그렇고 ‘이야기’로 눈을 돌려보자. 일본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아마 주군(主君)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장렬하게 목숨을 버리는 47인의 의협 남아들 이야기 ‘주신구라(忠臣藏)’가 아닐까 싶다. 일본인이라면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지금도 매년 12월이면 TV 드라마로 방영된다 한다.

형제처럼 지내는 일본인 친구 우시지마(牛島 洋) 씨는 운동선수 출신의 씩씩한 남성인데 이 드라마를 볼 때는 눈물을 흘린다. 그의 부인 게이코(敬子) 씨가 ‘운다’는 이유로 남편을 놀리는 것을 보고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첫 번째로 꼽힐까. 단연 춘향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춘향전에 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소설 영화 드라마 회화(繪?) 등을 통해 수없이 표출되었고 폭넓은 국민적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춘향전의 고향 남원, 그 아름다운 로망의 무대 광한루(廣寒樓)에 섰다. 전주의 한벽루(寒碧樓), 무주의 한풍루(寒風樓)와 남원의 광한루를 ‘호남의 삼한(三寒)’이라고 한다. 바람이 잘 통하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풍류를 즐기기 위해 좋은 자리에 잘 지어진 누각들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광한루원(苑)을 띄워주기 위한 추천사로 서정주님이 쓴 글의 일부이다. 멋지다.

이 광한루는 생각보다 연조가 깊다. 거의 6백년쯤 전인 세종 원년(1419)에 ‘광통루’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25년 뒤 정인지에 의해 ‘광한루’로 개칭되었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소실(燒失)된 것을 인조 4년(1626)에 복원, 오늘에 이르렀다.

광한루 주변을 천천히 완상(玩賞)하면서 오래 전에 읽은 원본 춘향전의 운율과 가락이 줄곧 머리를 맴돌아 그 일부나마 옮겨 적고 싶은 흥취(興趣)에 젖은 바 있다. 옛 철자법 그대로 소개하고 싶긴 하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많고 읽기도 어려울 터여서 가급적 현대어로 고쳐 옮겨본다.

“광한루 섭적 올라 사면을 살펴보니 경개가 장니 좋다. 적성(赤城) 아침 날의 늦은 안개 띄어 있고, 녹수(綠樹)의 저믄 봄은 화류동풍 둘러 있다. (중략) 또 한 곳 바라보니 어떤 일 미인이 봄새[鳥] 울음 한가지로 온갖 춘정(春情) 못 이기어 두견화 질끈 꺾어 머리에도 꽂아보고 함박꽃도 질끈 꺾어 입으로 함숙 물고, 옥수(玉手) 나삼(羅衫) 반만 걷고 청산유수 맑은 물에 손도 씻고 발도 씻고, 물 머금어 양수하며 조약돌 덥썩 쥐어 버들가지 꾀꼬리를 희롱하니, 타기황앵(打起黃鶯)이 아니냐. 버들잎도 주루룩 훑어 물에 훨훨 띄워보고 백설 같은 흰나비 웅봉(雄蜂) 자접(雌蝶)은 화수(花水) 물고 너울너울 춤을 춘다. 황금 같은 꾀꼬리는 숩숩이 날아든다. 광한진경 좋거니와 오작교가 더욱 좋다. 방가위지(方可謂之) 호남의 제일성이로다. 오작교 분명하면 견우직녀 어디 있나.”

원(苑) 안에는 광한루 이외에 완월정(玩月亭) 춘향사당 선취각(璇聚閣) 오작교 월매의 집 춘향관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명승지로서 오랜 세월 가꾸어져 온 탓인지 상당히 세련되어 보였고 원(苑) 밖의 상점 등도 잘 정돈되어 있어 보기에 좋았다.

세상은 서서히 보랏빛 시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무데서나 식사를 하고 숙소를 정하기만 하면 된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천천히 5분쯤 걸었을까. 찻집인 것 같은데 자그마한 간판도 그렇거니와 가게 이름이 ‘산들 다헌(茶軒)’, 특이했다.

분위기가 괜찮을 듯싶어 약간의 기대를 걸고 들어가 보았다. 자리를 잡기도 전인데 편안했다. 집기들의 배치나 소박한 꽃장식 등이 친척집에 온 것 같이 느껴졌다.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조용한 몸짓으로 다가왔다.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도 몸으로는 힘껏 봉사하려는 의지가 산들바람처럼 밀려왔다. 묻는 말에만 짤막하게 답변했다.

종업원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는 주인, 조희준(曺喜俊, 25). 좋은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청년이다. “천천히 고르시라”는 말과 함께 그가 남기고 간 메뉴를 보며 엉뚱한 곳에서 또 하나의 남원 운율을 발견했다.

우선 차림표의 서문(序文). 첫줄을 읽으면서 빠져들기 시작했다.
“산바람이 산들산들, 들바람이 산들산들/ 우려내는 정도 곱고, 녹여내는 맘도 따셔/ 눈물 태워 행[香] 만들기, 웃음 피워 차 만들기/ 보글보글 대추 맛에, 넉넉하다 녹다향에/ 가락 따라 님 생각도, 없었던 듯 편하다가/ 문 밀고 하늘 보니, 이곳은 산들다헌”

얼른 읽어 뜻을 살펴보고 가락에 맞춰 한 번 더 읽어본다. 읽을수록 재미있고 흥겨워진다.

본론에 해당하는 차림표는 가락보다는 내용면에서 눈길을 끈다.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차 한 잔씩들이지만 설명문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신뢰감이 쌓인다. 재미있어서 상당부분을 그대로 옮겨본다.
<녹 차>
o 세작: 4천원. 하동군 화개면 생산. 다기(茶器)는 소두(紹逗) 권영훈 작가님 제작분 사용
<전통차>
o 오미자차: 4천원. 문경(동도면) 청정지역에서 3~4년차 자생 오미자 사용.
o 쌍화차: 5천원. 익산 원광약초 조제분을 ‘산들’에서 8시간 달이고 지리산 주천면 한봉꿀 성청 사용
o 매실차: 4천원. 하동군 화개리 ‘산들’ 제휴 일반가정에서 4년간 숙성된 것 사용
o 대추차: 4천원. 전북 완주군 ‘고산농원’ 대추 사용하고 한봉꿀 첨가
이밖에도 허브차(5가지) 떡(시루떡, 백설기, 호박설기, 쑥설기, 눈내린 대추설기) 커피(다양) 등이 두루 제공된다.

궁금해서 주인 희준 청년과 잠시 대화.
“누가 이렇게 멋진 상호와 글을 만들어 주셨나. 본인 작품인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해 주셨습니다.”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가?”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십니다.”
“아! 어쩐지 다르다 했지.”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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