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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의 매화 꽃길 5백리(5)안타까운 유적지(遺蹟地)
  • 최창신 고문
  • 승인 2009.05.19 09:57
  • 호수 637
  • 댓글 0

 

   
구례읍으로 가는 길(국도)은 걷기에 좋았다. 자동차가 숨 막힐 정도로 많이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오른쪽으로는 지리산 산자락이 아름다운 풍광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였고 왼쪽으로는 유장(悠長)한 섬진강이 선비처럼 의젓하게 동행해 주었다.

 

섬진강(蟾津江). 이름은 수없이 들어왔지만 가까이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생소했다. 그 이름이 안겨주는 이미지도 생경(生硬)했고.

섬진강의 섬(蟾)자는 두꺼비와 달,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래서 섬진은 두꺼비 나루, 자연친화적 느낌이 들고 달빛 나루, 또는 달 그림자 나루(개인적인 해석), 시적(詩的)이다. 둘 다 좋다.

이름만 좋은 게 아니다. 강의 모습은 더욱 좋다. 강안(江岸)의 경치가 대체로 훌륭하거니와 강줄기의 굽이굽이 흐르는 굴곡은 날씬한 새악시의 허리처럼 유연하다. 가장 좋은 것은 깨끗한 백사장. 어디라 할 것 없이 넓거나 좁은 모래톱들이 신기할 정도로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어 놀라웠다.

섬진강 때문에 흥에 겨웠던 마음은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土旨面) 송정리(松亭里)에서 그만 형편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석주관(石柱關)’이라 했던가. 거기에 칠의사묘(七義士墓)가 있다. 문제는 그 안내판들. 친절하게도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4개나 세워져 있는데 우리말과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된 것들이었다.

우선 우리말 설명. “선조 31년(1597) 정유재란 때 이 석주관을 죽음으로 지킨 7인의 의병
장과 당시 구례 현감을 모신 무덤”이라고 소개하면서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7인의 의병장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왕의성(王義成)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대항하였다”고 기록. 아니? 북쪽의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에 ‘왜적’과 싸웠다니!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사이에는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의 간격이 있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 왕의성의 나이를 낮게 잡아 30살만 됐다 해도 70 노인으로 병자호란을 만나게 되는 셈인데 또 의병을 모집해서 전쟁터로 나갔다고?

그렇지만 특이하게 병자호란 때 호남의 의사(義士)들이 의거한 사적을 기록한 책 ‘병자호란 창의록(倡義錄)’이라는 게 있는데 여기에 “현감 이흥발 등 5인이 왕을 도우려고 호남의 조수성(曺守誠) 등과 여산에서 만나 정홍명(鄭弘溟을)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청주에 이르렀으나 인조가 이미 항복했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돌아갔다”는 줄거리가 담겨 있다.
따라서 왕의성의 재차 의병모집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이에 관해 아무런 설명이 없어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힘들다.

가장 보기 흉하고 문제가 많은 건 영어 설명문. ‘magistrate(縣監)’ 앞에 정관사를 붙인 것까지는 좋으나 두 단어 사이에 부사 ‘then’과 고유명사 ‘Gurye’를 집어넣음으로써 해괴망측한 표현을 사용했고, 단순한 부주의로 전투의 'battle'에서 'e'를 빼먹었으며, 문장 가운데에 생각 없이 마침표를 찍어버려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역시 단순한 실수겠으나 ‘부여하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을 ‘bestowd'로 표기,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가 하면 쉼표를 남용해 어색한 문장을 만들었고, 모음 표기에 동원된 혼란스러움이 거슬렸다.

중국어 안내판도 코미디처럼 보이기는 마찬가지. 정유재란(1597~1598)이 마치 1598년에 일어나서 이듬해 끝난 것처럼 연도를 틀리게 기록한 것까지는 애교로 보아 넘긴다 하더라도 중요한 문장 하나를 몽땅 빠뜨려 39년 후에 일어나는 병자호란이 마치 정유재란 다음해에 발발(勃發)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으며 더 웃기는 점은 병자호란을 ‘병자왜란(丙子倭亂)’이라고 표기한 것.

의사(義士) 중 한 분인 왕득인(王得仁)의 이름도 왕덕인(王德仁)으로 잘못 적혀 있다. 아울러 이 전쟁에서 왕의성은 청나라가 아닌 ‘일본군’에 저항했다고 기록. 작은 실수이긴 하지만 ‘순조(純祖)’를 ‘純組’로 잘못 쓰기도 했다.

우리말 안내판을 제외하고는 3개국 설명문 가운데 일본어판이 가장 잘 돼 있었는데 그래도 정유재란이 끝난 해를 시작된 해로 썼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과 대항한 게 아니라 일본군과 싸웠다고 초등학생도 틀리지 않을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토지면 구산리(九山里) ‘구산식당’에서 좀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꽤 많이 걸었으며 낮 2시가 될 때까지는 그럴듯한 식당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주인 내외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구례군 경내(境內)에 들어오면서 보니까 ‘이곳이 세계 최고의 장수마을’이라고 자랑하는 큼지막한 홍보판이 세워져 있던데 무슨 근거라도 있는가요?”
“지금은 타계하셨지만 백살 전후의 고령 노인들이 여러분 계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구례군 주민들이 장수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물이 좋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구례읍 거의 다 가서 ‘하사마을’과 ‘상사마을’이라고 있습니다. 거기가 대표적인 장수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두 마을을 가시다가 운조루(雲鳥樓)라는 곳에 잠간 들러보십시오.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볼만합니다.”
‘운조루’는 토지면 오미리(五美里)에 있는 민속자료 제8호로 영조 52년(1776) 삼수부사 유이주(柳爾?)라는 분이 지은 주택. 이 집이 가치있는 이유는 조선 양반가의 대표적인 가옥구조와 모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한의 3대 길지(吉地) 중 하나인 좋은 자리에 세워져 있다 해서 더 유명해 졌다 한다.
운조루도 그랬거니와 상사마을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다리품을 한참 더 팔아야 했다. 장수촌으로 알려진 상사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을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으나 인적이 끊어진 듯 보였다. 밝은 한낮이어서 망정이지 날씨가 음산했거나 어두웠더라면 유령의 마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래 전 미국 LA에서 보았던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세트장처럼 빈 마을이었고, 비현실적인 세상(unreal place)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을 옆 동산 밭에서 내려오던 84세 노인을 만나 ‘좋은 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산중턱의 샘물(지하수를 파 올림)을 가리켰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물을 먹는다고 했다.

“왜 마을이 텅 비어 있습니까?”
“젊은이들은 거의 대처(大處)에 나가 별로 없고, 늙은이들은 일 나갔거나 노인회관에 모여 있을 것이여.”
참 특이한 마을도 다 있다 싶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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