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한인사범수기] “나는 부끄럽지 않다” [5]

처음 가 본 독일의 가정집, 차고에 내려서부터 할아버지는 여기는 정원, 여기는 채소밭, 이것은 벚나무 등 집안을 한 바퀴 돌면서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정원의 장미와 이름 모를 꽃들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할아버지는 2차대전 후 손수 삽으로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에 이르는 빨간 벽돌의 전형적인 독일식 집을 지었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나는 왠지 모를 감동을 받았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문패에 Karl u. Sopie Grossmann (칼과 소피 그로쓰만)이라고 쓰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Karl Grossmann (칼그로스만), 할머니는 Sopie Grossmann(소피 그로쓰만)이었다.

계단을 올라가 2, 3층을 구경하는데 응접실, 침실, 부엌, 아들방, 손님방 등 공간이 넓고 밝으며 바닥에는 빨간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집안 구석구석 짜임새 있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점심은 스프를 시작으로 하여 닭고기 요리를 메인으로 후식으로는 초콜릿 크림과 과일을 대접해 주셨는데 두 분이 편하게 대해 주셔서 조금도 어색함 없이 맛을 음미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식사 후 할머니께서 접시를 물에 담가 설거지를 하셨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옆에 서서 수건으로 접시들을 닦는 게 아닌가. 남자가 부엌에 들어서서 돕는 광경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Kann ich Ihnen helfen(저도 도울까요)?”
“Sie sind unser Gast (당신은 우리 손님입니다).”
팔을 걷고 설거지를 도우려 했지만 그로쓰만씨는 괜찮다며 사양을 하셨다. 그러다 내가 계속 도우려하자 정 그렇다면 같이 설거지를 하자면서 나를 굳이 말리지는 않으셨다.

“Viele Haende machen ein schnell Ende(손이 많으면 일이 빨리 끝날 수 있지요).”
그로쓰만씨는 재치 있는 말씀을 하셨다. 함께 설거지를 하는 동안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두 분은 아직 낯선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나에게 무엇이든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다. 이후 댁에서 가까운 숲으로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와서 할머니께서 직접 구우셨다는 딸기 케이크를 커피와 곁들여 먹었다.

전형적인 독일 가정의 일요일 오후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8시간씩 일을 하고 토요일은 시장을 보고 정원을 가꾸며 부인은 집안청소를 비롯한 가사를 오전에 대부분 마무리하고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일을 하지 않고 한가로이 가족들과 시간을 같이 하면서 주일을 보내는 그야말로 부러운 독일 국민들이었다.

이렇게 인연이 된 그로쓰만 부부 댁에는 일요일이면 방문하게 되었고 때로 토요일부터 함께 주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로쓰만씨 내외는 아들 둘, 딸 둘이 있었는데 다들 출가하여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독일의 대표적인 가족상이었다. 이들 내외는 주말마다 아들과 딸집을 번갈아 방문하여 정답게 지내곤 했는데 어느새 그 틈에 내가 아들 역할을 하며 사랑을 받고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광산 주변 루르공업단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말이 거칠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광산으로부터 불과 20km 떨어진 그로쓰만씨 내외가 살고 있는 도시의 주민들과는 교육의 수준과 언어 사용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선 빨리 광산 기숙사에서 나야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그로쓰만씨에게 말하였더니 마침 그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며 200m 떨어진 Huesken(휘스켄)씨의 집에 빈방이 하나 있는 걸로 안다며 그리로 가서 물어보자고 하셨다.

찾아간 곳은 내가 원하던 방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며 가격 역시 저렴한 편이어서 마음에 쏙 들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광산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손수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보다 더 어려웠던 점은 이른 새벽 일어나 서둘러 자전거를 타고 20km나 되는 거리를 달려 출근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다 나은 환경에서 좋은 분들과 함께 생활하며 독일어도 향상되는 감을 느꼈다.

오후에는 주인인 휘스켄씨 내외와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지곤 하였다 .이런 생활의 작은 행복이 어려웠던 시기를 잘 극복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물위에 뜬 한 방울의 기름과 같은 외국인이 되지 않고 한 방울의 물이 되어 이 사회에 가능하면 빨리 흡수되고 이 나라의 풍습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워 나가야겠다는 것이 나의 결심이었다.

오후에 만나서 같이 운동하던 클라우스와 안드레아스는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이제 같이 운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서운한 이별을 해야 했지만 18세가 되면 운전면허증을 따서 내가 머무는 곳으로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곽금식 사범 tkdnews@korea.com

곽금식 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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