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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한인사범 수기]
나는 '태권도 선교사, 거지왕' [7]
나의 미국 첫날밤은 모래밭 텐트 속
  • 신동기 사범
  • 승인 2008.06.09 13:04
  • 호수 594
  • 댓글 0

어려운 여권을 받았지만 여행사 직원 얘기로는 비자 받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마 지금보다 10배 이상 힘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신동기 사범.

날을 잡아 을지로 입구 반도 호텔 건너편에 있던 미 영사관에 비자를 받으러 갔다. 당시에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한가하였다. 내 앞에 외무부직원이 수십 개의 외교관 여권을 미 영사관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날 아침 월남에서 미군사령관에게서 받은 표창장과 미군 신문에 난 나의 사진과 기사를 가지고 갔다.

초청장과 여권을 바로 외무부 직원 다음에 신청하고 초조히 기다림 속에 앉아 있는데 옆에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호명하면 안으로 들어가 미 영사와 인터뷰를 하고 나왔다. 나올 때 그 사람들 표정을 보면 비자를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판명이 되었다.

그런데 한 10분 정도 되었을까 나의 이름을 부르며 여권을 돌려주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안에 들어가 영사와 면담을 하는데 나는 인터뷰도 안하고 여권을 돌려받았으니 틀렸구나 하고 낙담한 채 여권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내가 같이 제출한 표창장과 신문기사를 안 돌려준 것이 생각이 나서 여권을 펼쳐보니 아 그런데 거기에 미국 입국 비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이었다. 그때 감정은 말로 표한 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 기쁨에 표창장과 신문 기사를 돌려받는 것도 잊은 채 그냥 온 것이 지금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나는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하나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에 오려면 비행기 표 구입 등 많은 수속비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한 푼도 부모님께 도움을 안 받았다. 내가 월남에서 번 돈으로 수속을 했고 또 비행기 표를 구입하였다.

당시 한국 외환 법은 외국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미화 백 달러만 소지한 채 출국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는 달러가치가 지금보다 훨씬 높고 한국이 못 살았지만 백 달러 가지고 는 미국에서 일주일도 못 견딜 때였다. 그러니 돈 많은 재벌들 가족이나 미국에 갈수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1971년 8월 21일 나는 대망의 미국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김포 비행장이었는데 조그만 시골 기차역만 하였고 사람들은 옥상에 올라가 손을 흔들며 환송하였고 승객들은 버스를 타고 비행기로 이동하여 탑승을 하였다. 그때 김포 비행장이 항상 눈물의 환송 식장이었다.

당시 탑승률은 3분의 1도 안되어 좌석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날 나와 나란히 동승한 미국 입국 동창 2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뉴욕 한인 회장을 지낸바 있는 강익조 태권도 사범과  미국에서 손꼽는 버스회사를 운영하는 최해건 사장이 그들이다. 지금도 우리는 가끔 만나 미국 입국 동창회를 하곤 하는데 35년이 지난 지금도 감회가 깊다.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온 이유는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김재홍이라는 친구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명문가 자제로 고 1때 이민을 와서 미국 군대를 갔다 와서 직장을 다니며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나의 미국 첫날밤은 모래밭 텐트 속이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할 때가 방학 때였고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있는 빅서라는 국립공원 휴양지로 캠핑을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데리러 2시간 이상을 운전을 하고 비행장에 나와 그 친구 집에 짐을 내려놓게 하고 바로 빅서로 온 것이었다. 아마 미국에 와서 첫날밤을 텐트에서 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친구가 사는 아파트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였는데 세 개의 방을 6명이 월 50불씩 나누어 300불을 내고 있는 숙소였다. 나도 친구가 다니는 Chabot College 라는 대학에 입학을 해서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헤이워드라는 작은 도시에 조그마한 건물을 얻어 태권도장을 개관하고 미국인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도장 안에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 한 명이 누울 수 있는 아주 작은 방이라 2층 침대를 만들어 친구와 둘이 살면서 도장을 운영하면서 낮에는 학교를 다녔다.

당시 태권도라는 이름을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고 코리안가라테라고 알려져 있을 때였다. 한국인 태권도 도장도 거의 가라테 간판을 달고 있었다. 난 태권도 간판을 달고 그 밑에 Traditional Karate라고 썼는데 설명하자면 태권도가 가라테의 원조라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신동기 사범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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