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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한인사범 수기]
나는 ‘태권도 선교사, 거지왕’ [6]
태권도를 통해 전쟁에 찌든 월남인들에게 희망을
  • 신동기 사범
  • 승인 2008.05.23 13:45
  • 호수 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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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태권도 교습비로 10불씩 받았는데 월 300불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그때 한국군 병장 월급이 54불 미국 사병의 월급이 250불 정도였으니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 나이도 어리고 돈에 욕심이 없었으니 돈을 모은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군 교관에다 미 헌병을 가르치니 미국 P.X에 들어가 물건을 마음대로 살 수 있었고 부대 정문도 자유롭게 드나드니 마음만 먹으면 돈을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P.X에서 산 물건은 부대 정문 밖에만 나가면 평균 두 배 내지는 세배까지 받으니 돈 버는 게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그때 많은 친구들이 월남에 와서 전투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기에 나는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많이 도와주고 접대해 주었다. 전장에서 새까맣게 탄 친구들이게 미안한 마음이 항상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더 잘해 주고 싶었다.

한국의 부모님이나 가족들은 위험하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야단들이었다. 월남에서 우리 한국군은 한국, 미국, 월남 등 3개국의 지원을 받는 식품으로 먹을 게 풍족하였지만 우리 입맛에 맞는 김치, 고추장, 된장 등은 거의 없어서 더운 날씨에 병이 다 날 지경이었다.

미 4사단 교관으로 있을 때 한 번은 입맛을 잃어 일주일 이상 밥을 못 먹었더니 고향 생각에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 되었다. 미군 식당에서 내가 찾는 음식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 민간인들을 만난 것이었다. 그때 미국 군수품 수송은 한진해운이 맡아 트럭으로 운송을 하였다. 그 회사의 운송 팀은 퀴논 항구에서 내가 있는 미 4사단까지 4시간 정도 운전을 하고 와 짐을 내리고 해지기전에 돌아가야 하는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그분들은 아이스박스 속에 밥과 김치를 넣고 트럭 속에는 총까지 갖고 다녔다. 그 한국인 아저씨들에게 김치를 얻어먹고 오니까 병이 감쪽같이 나았다.

나트랑에 있을 때 해변에는 많은 전쟁고아들이 있었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모래밭 아무데서나 그냥 잠을 자면 되었고 먹는 것은 동냥을 하면서 살았다. 우리 한국군부대는 음식이 항상 많이 남아서 버렸다. 그래서 나는 식당에 부탁을 해서 양동이 두 개에 하나는 밥 하나는 반찬을 담아 고아들에게 매일 저녁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나를 태끅따우(태권도)부수(사범) 라고 불렀다. 나는 틈틈이 그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주곤 하였다.

하루는 그 애들이 보여줄 것이 있다고 나를 어디로 데려갔다. 그곳은 월남 고유의 무술 도장이었다. 보비남이라고 하였는데 중국 무술과 프로레슬링이 혼합된 모습이었다. 그래서 거기 사범과 친구가 되어 태권도와 보비남을 교류하며 월남 무술을 배우게 되었다.

나의 월남참전 생활은 보람이 있었고 대한민국이 전쟁만을 위하여 참전한 것이 아니며 태권도 등을 통해 전쟁에 찌든 월남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6.25전쟁을 겪고 다시 태어난 대한민국의 재건정신을 전해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비록 지금은 월맹이 이겨서 당시 우리의 적국이 통일한 베트남이 되었지만 미국에 비해 한국은 적대감이 별로 없고 많은 교류가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월남 태권도 교관단의 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정말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나의 젊은 날의 역사가 되었다.

71년 초 나는 귀국하여 제대를 하였다. 처음 몇 달은 놀기에 바빴고 노는 것도 지칠 때쯤 되어 무엇을 해야 될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외국에 나간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고 귀국해서 여러 곳에서 좋은 제안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자 한국이 좁게 보였고 갑갑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미국에나 한 번 갈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 당시 외국에 나가는 게 힘든 때였고 미국은 더욱더 힘들어 재벌들 자녀나 갈 수 있다고 생각되는 시대였다. 그래서 나는 월남에서 가르친 미군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바로 한 제자에게서 초청장을 받았다. 그 초청장을 들고 한 여행사를 찾아가서 미국에 가겠다고 하니 힘들 거라고 이야기 하며 그러나 한 번 시작해 보자고 하여 먼저 여권을 신청하였다. 지금은 비자 받기가 힘들지만 그때는 여권 받기가 비자 받는 만큼 힘든 때였다 경찰서와 정보부의 신원조회를 먼저 받아야 했는데 나는 걸리고 말았다. 집안에 일제시대때 좌익 독립운동가가 많이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거의 희망을 잃고 좌절감에 빠져 매일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 선배를 우연히 술집에서 만났다. 거기에 여자 친구 분이 하나 동석하게 되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여권을 못 받아 고민하고 있다고 하니깐 나에게 정확한 이름과 생년월일을 달라고 하였다. 내가 의아해 하니깐 옆에 선배가 이분이 바로 경찰신원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믿지는 말고 한 번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 후 얼마 지나 여권이 나왔다 그 후 한 번도 다시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그 여자 분이 힘을 써준게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신동기 사범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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