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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명 칼럼] 최홍희는 왜 역사적 왜곡을 남겼을까!
  • 이경명 전문위원(태권도문화연구소장)
  • 승인 2008.05.14 12:48
  • 호수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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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 최홍희가 잠든 묘소의 묘비(墓碑)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최홍희 선생, 국제태권도연맹 총재, 1918년 11월 9일생, 2002년 6월 15일 서거”

이경명 소장.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가 남긴 기록, 즉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 회고록, 태권도와 나 1~3>(1997, 1998, 2003 간행)을 둘러싼 논쟁이 있을 뿐이다.

그 대표적인 진위(眞僞)논쟁의 중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듯하다.

첫째는 1955년 4월 11일 태권도 명칭제정, 둘째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의 ‘태권도’ 휘호하사(徽號下賜) 및 명칭재가, 셋째는 현 국기원 원장 엄운규의 부역(賦役) 기록 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사실적이지 않고 그가 남긴 기록은 허위이며 왜곡이라는 것이 규명되고 있다.

앞서 세 가지 허위기록 가운데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록에 대한 전말은 필자의 단행본 <태권도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태권도의 어제와 오늘> (어문각, 2002)에 상세히 규명돼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기록, 즉 부역 관련 대목의 역사적 규명에 앞서 다음에 시선집중하자.

최홍희는 스스로 자신을 ‘태권도 창시자’라 칭한다. 이에 대한 ‘창시 개념의 정의가 요구되는 데, 창시(創始)란 처음 시작함을 뜻하고 있다. 태권도 창시자란 태권도를 처음 시작했다는 뜻으로 풀이하자면, 하나는 태권도 수련을 맨 먼저 시작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속된 말로 태권도를 제정했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는 듯하다. 나중의 뜻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홍희는 태권도 명칭과 창헌류 기술체계의 창안자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창시자에 대한 오해의 간극을 없애기 위해서도 개념의 정리가 필요하다. 태권도 명칭제정 -작명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이 처음으로 논의된 날은 1955(단기 4288년) 12월 19일이다. 그는 이날을 은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듬해 1956년 1월 30일 특무부대장 김창룡 저격사건으로 이승만대통령 면담이 무산됐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당시 이 대통령으로부터 ‘태권도’ 휘호 하사 및 명칭 재가가 없었고,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권도’ 휘호 내림과 명칭 재가는 결코 없었다. 단지 최홍희의 허위기록일 뿐이고 역사적 왜곡이다. 그것에 대한 증빙할 수 있는 기록물('태권도‘ 휘호) 등을 그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근자에 간행된 <ITF 태권도 가이드북>(2008년 3월 11일, 서울: 광림북하우스)의 머리말에는 이런 글이 보인다. “전국의 많은 태권도인들이 바른 역사와 또 정통태권도의 지침에 본 서적이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에서 바른 역사 에 대한 올바른 연구와 사실적 기록을-지금이라도- 남길 수 있어야 올바른 평가를 기대할 수 있을 듯싶다.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엄운규 국기원장에 대한 최홍희의 회고록(279쪽 19행)에는 “후일 알았지만, 이원국은 1.4후퇴 때 서울에 남아있으면서 청도관 옥상에 붉은 기를 게양하는 동시에 그의 제자 엄운규와 함께 붉은 완장을 달고 부역한 것이 탄로되어 추방을 당한 것이다”에 대한 기록은 허위(虛僞)라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다. 필자가 최근 입수한 ‘역사적 자료’를 여기 공개한다.

당시의 청도관은 시천교회당인데 옥상이 없는 뾰족한 곳에 국기를 게양할 수가 없는 건물이었다. 김명수는 2001년 7월 14일 17시경 캐나다 토론토 시내 모 일식집에서 최홍희(2002.6.15. 평양에서 사망 747DON MILLS RD #223 TORONTO CANADA) ITF 총재와 부인 한춘희 그리고 진술인 3인이 만나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되니다(2001년 진술인의 출입국사실 확인 가능).

김명수가 최홍희 총재를 만나려한 이유로, 1. 1990년 진술인이 한국 최초로(태권도연구) 박사학위과정 연구논문에서 태권도사 분야관련 최홍희 총재가준 태권도명칭제정위원회 신문기사의 출처가 동아일보라 하였으나, 사실과 다른 문제. 2. 자서전 <태권도와 나>(2000.6.제1권)에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은 1.4 후퇴(1951)때 서울에서 제자 엄운규와 같이 부역한 것이 탄로되어 추방을 당한 것. 이란 내용의 중대성이라는 두 가지 질문을 하여 다음의 답을 확인하다.

1. 1955.4.11. 태권도명칭제정위원회 신문기사는 동아일보가 아니면, 확실한 기억이 없으나 정치신문일 것이다.
2. 자서전 ‘태권도와 나’ 의 이원국 부역 관련내용은 엄운규와 같이 부역하였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므로(편집자의 실수) 다음 새로 출판할 통합 권에서 내용을 수정 발간할 것이다.
그리고 엄운규는 당시 군복무 중이었고, 6.25.참전용사로서 보훈처에서 유공자명예수당을 받고 있음. <김명수 교수 자료 제공>

그가 태권도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기려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중대한 역사적 기록을 바르게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의도적으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생전에 염원했던 “하나의 태권도”에 대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으려나, 그것은 전적으로 양식 있는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몫일 듯하다.

이경명 전문위원(태권도문화연구소장)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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