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6.25 화 19:30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해외 한인사범 수기]
나는 ‘태권도 선교사, 거지왕’ [1]
캘리포니아 신동기 사범
  • 신동기 사범
  • 승인 2008.04.21 13:54
  • 호수 588
  • 댓글 0

미국 김홍래 사범의 수기 ‘태권도에 내 인생을 맡기고’는 지난주 12회를 마지막으로 마치고 이번 주부터는 지난 37년을 미국에서 태권도 전파에 앞장선  캘리포니아 신동기 사범의 수기 ‘나는 태권도 선교사, 거지왕’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신동기 사범

나는 서울 왕십리에 있는 무학초등학교를 1950년대 말에 졸업하였다.

내가 살던 곳은 무학여고 앞인데 조금 떨어진 산언덕에는 한양대학교가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앞은 논과 미나리  밭 등이 있었다. 무학여고 뒤는 완만하게 경사진 산이 있었고 그 산은 절벽으로 끝나며 그 밑에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왼편에는 뚝섬유원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 지금의 강남 한 중심으로 자리잡은 봉은사로 갈 수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그 절벽을 오르내리며 놀았다. 산과 절벽이 한강과 조화를 아주 잘 이루었던 어릴 적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나는 매년 7월 1일이면 제자들을 데리고 고국을 찾는다. 세계 태권도의 메카인 국기원을 방문하고 한국에서의 태권도 훈련과 관광은 매년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다.

2006년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청계천으로 갔다. 이 청계천이 4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다가 복원되었다 하니 일행 모두는 정말 감탄하는 놀라운 눈으로 청계천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어릴 적 뛰어 놀았던 그 절벽에는 지금 아파트들이 한강을 내려다보며 무리지어 서 있다. 제주시 바닷가에 있던 아름다운 용암천도 시멘트로 덮여 희미한 모습만 보였었는데 새로운 청계천을 보면서 나는 문득 왕십리의 그 절벽과 제주도 용암천도 복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50년대 후반은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우리 집 뒤에는 조그만 양조장이 있었는데 애들이 막걸리를 만들고 남은 술 찌꺼미(이게 표준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불렀다)를 얻어먹으려고 많이 왔다. 학교에 얼굴이 벌개져서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좋은 부모님을 만나 배고픈 것을 모르고 자랐다.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한양대학교 앞은 논과 밭이었다. 그곳에 나무로 지은 오래된 막사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 태권도장이 있었다. 어른들이 매일 같이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었다. 나의 키는 지금 170센티미터인데 초등학교 때 거의 다 자라서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컸다. 그래서 나는 동네에서 대장 노릇을 했다. 그 때는 별로 어린이들에게는 놀 거리가 없어서 나무를 잘라 칼싸움하는 것이 최고의 인기 종목이었다. 정월 대보름때 깡통에 불 넣어 돌리는 쥐불놀이나 동네 대항 투석전, 한강에서의 물놀이, 겨울철 썰매타기 등 어린이들에게는 제한된 놀이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일 태권도 도장에 가서 어른들이 수련하는 것을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었고 또한 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당시 태권도장에는 어린애와 여자는 한명도 없었고 머리를 빡빡 깎은 고등학생들과 어른들만 운동하고 있었다.

도장 앞에는 나무 기둥을 땅에다 세우고 새끼줄로 감은 기둥들과 시멘트로 만든 역기가 있었으며 도장 안에는 군인들이 쓰던 더블 백으로 만든 백이 하나 천정에 달려 있었고 오래된 나무 마루가 깔려 있는 게 전부였다.

처음에 구경 갔을 때 기합들을 지르며 품새와 겨루기를 하는 것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때 가르치는 사범님의 눈이 얼마나 매서운지 눈에서 불빛이 나오는 것처럼 보였으며 학생들은 사범님의 말 한마디면 절대 복종 하는 게 어린 나의 눈에는 존경과 두려움의 연속으로 와 닿았다.

처음에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무서워서 도장 입관에 대해 물어보지도 못하였다. 여러날이 지난 어느날 사범님께서 운동이 하고 싶으면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집에 와서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 허락을 받으라고 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선린상업전문을 졸업하시고 은행에 오래 계셨던 분으로 우리나라 은행 초창기에 활약한 매우 엄격한 분이셨다.

그래서 조심조심 아버지께 도장에 보내달라고 말씀 드렸더니 단번에 안 된다고 거절하셨다. 태권도는 깡패들이나 하는 운동이니까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중학교에 들어가야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할 수 없이 나는 매일 도장에 가서 어른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눈으로 보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연습해 볼 수밖에는 없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5남 3녀 8남매를 두셨는데 나는 7번째로 내가 제일 문제아였다. 내가 일찍 해외로 나오는 바람에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큰집으로 방이 10개나 되고 뒷마당이 큰 집이었다. 나는 뒷마당에 가마니를 여러 장 깔고 동네 애들을 불러다가 내가 봤던 그 대로 운동을 하며 사범님 흉내를 내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마침 동네 고등학교 형이 그 도장에 나가 운동하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형을 졸라 어렵게 개인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 형은 당시 홍띠로 나에게 우상 같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주춤 서기, 주먹 지르기를 배우고 여러 가지 막기를 배웠는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지 학교 갈 때도 걸어가며 연습을 하고 방에 누워서도 발차기를 하기도 하였다.

신동기 사범  tkdnews@korea.com

<저작권자 © 태권도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최신댓글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