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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의 걸어서 탐라(耽羅) 일주(5)직원의 장난으로 단수된 관광단지
  • 최창신 고문
  • 승인 2008.04.14 10:17
  • 호수 587
  • 댓글 0

월림리를 지나 저지리(楮旨里)를 통과할 무렵 날씨가 끄무레해지더니 눈발이 날렸다. ‘별일도 다 있다’ 싶었다. 서울에 남아 있던 끝물 추위를 내가 몰고 내려왔나?

최창신 상임고문

그러나 알고 보니 때아닌 눈의 기습공격으로 나라 전체가 휘청, 다운될 뻔했다는 것이었다. 저녁에 숙소에서 본 TV 뉴스. 집중 강타를 당한 영동지방은 폭설로 마비가 돼버렸고, 서울도 집중공격에 복부를 제대로 맞아 한동안 얼굴이 핼쓱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 그렇다면 제주도는 약과였군!

계속 걸으면서 도로표지판에서 ‘저지리’라는 마을이름을 읽을 때마다 그 발음 때문에 이상한 생각이 다양하게 떠올랐다. 사실 ‘저지리’라는 말은 좋은 뜻을 지니고 있다. 저(楮)는 ‘그 껍질로 종이를 만들 수 있다[皮可爲紙]’ 하여 닥나무라는 의미이고, 지(旨)는 뜻·아름다움·맛을 뜻한다. 이를 합하면 아름다운 닥나무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다르게 읽혀진다. ‘저질이’·‘지지리’하는 식으로. 아울러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의 이미지까지 떠오른다. 아마도 오래 걷다 보니 너무 심심하여 장난끼가 발동했나보다.

저지리의 파출소 바로 옆집은 말고기음식 전문식당. 말고기를 먹는다는 말은 들은 바 있으나 실제로 식당을 보기는 처음이다.

흥미가 동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말고기가 기본이고 ‘말 갈비’ ‘말 육회’도 즐길 수 있다 한다. 아니, 육회로도?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으므로 호기심을 억제하고 그냥 지나갔다.

조금씩 쉴 때나 편안히 걸을 때면 지도를 열심히 살펴보았다. 길을 잃지 않으려는 게 목적이었지만, 마을이름이 대체로 특이하거나 재미있어서 점점 빠져 들어갔다.

협재리라는 곳에는 ‘개느리’(느림보 개가 살았나?) ‘개빼’(개 뼈를 모아 묻어 두었는가?) ‘개오기’(개도 오기를 부리나?) 등 개에 관한 이름이 많았고, 저지리를 지나면서는 ‘광털’ ‘아래털’ ‘웃털’이 차례로 위치해 있었다. 세상에 ‘털’이라는 이름의 지명이 있는 것 자체가 웃음을 자아내게 했는데 한 군데도 아니고 3군데라! 그 중에도 ‘아래털’은 국도가 X자로 교차하는 지점에 있어 묘한 연상작용까지 불러일으키니 그 배경이 궁금.

양배추류가 잘 재배된 한림 근처의 밭. 이 밭의 이름은 확인해보지 않았으나 이러한 밭들이 '무슨 무슨왓'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고 있어 소규모 지명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재미있어서 자꾸 들여다보다가 또 묘한 이름들을 발견했는데  ‘왓’으로 끝나는 지명이 의외로 많은 데 놀랐다. 지나온 길 주변만 살펴보아도 따리왓·최선이왓·양지왓·수머리왓·막새왓·끌왓·골딩왓·앞쉬왓·앞케왓·숭굴왓·사림왓·시구왓·관솔왓 등으로 부지기수였다.

‘아마 왓이라는 말은 동네 혹은 마을이라는 뜻일 거야. 규모가 좀 작은 마을이름이겠지’ 하면서도 막연한 짐작으로는 의문이 풀리지 않아 김창완 국장에게 물었더니 ‘밭’이라는 말이라고 알려줬다.(사실은 김 국장도 본가에 전화로 확인하여 알게 됐다.)

반면 같은 지역에 샘이밭·존섭밭 하는 식으로 ‘밭’으로 끝나는 지명도 있다. 그러고 보니 훈민정음 창제 때 있다가 없어진 3개의 글자들 가운데 하나가 미친 영향과 관련, 금방 이해가 되었다.

중간목표 지점 대정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관광으로 유명한 중문(中文)까지 또 다시 30km를 더 걸었다. 자연스럽게 강행군이 돼 버렸다. 마지막 10km 구간에서는 두 발에 모두 현저한 고통이 느껴져 힘들었다.

중문의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발을 점검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양쪽에 밤톨만한 물집이 잡혀 있었다. 작은 것도 두 개 더 있었다. 빨리 씻고 직접 치료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제주 관광지도

‘세상에 관광지라는 데가 뭐 이래.’ 지배인에게 따졌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간 지 한참 만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시청 직원이 장난하느라 뭘 잘못 만져 이 일대가 모두 단수되었습니다. 언제 물이 나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씻지 못하는 거야 참을 수 있겠으나 발의 손질은 어찌 하나? 시청직원은 무슨 장난을 했나. 잘못된 걸 알았으면 왜 냉큼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하나? 여기가 관광단지 맞지?’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천정만 바라보았다. 물집을 치료하고 자야겠다. ‘치료’라고 해봐야 소독약도 없어 바늘로 그냥 찌르고 실을 끼워 놓은 상태로 물을 제거하는 것. 생각처럼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씻지도 못한 손으로 꾹꾹 눌러 물을 빼고는 붕대로 감았다. 내일은 괜찮을까? 장난치다  단수시킨 직원은 두 발 뻗고 편히 잠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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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상임고문

- 현 국기원 이사. 1960년대 선수생활을 한 정통 태권도인.

언론인(서울신문) 출신으로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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