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시 “욱!”함을 삭히면서 커피 한 잔을 따라들고 의자에 앉으려는데 “국(미군들이 동양을 무시하는 속어)의 여자들은 그것이 옆으로 찢어졌는데......”하면서 또 시작했다. 순간 나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모욕감에 그만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를 그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우고 말았다.

“이 나쁜 놈의 새끼! 만약 다음에 너를 밖에서 다시 만나면 내가 그냥 두나봐라!”하고 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것이 그 회사와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그랬는데 18년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1988년 7월 어느 날 필립이라는 그 옛날 작업 감독관이 내가 운영하는 맥주 도매상에 얼음 배달을 해 주었다.

“당신 혹시 나를 기억하겠소?”

“잘 모르겠는데 .....”

이미 초라한 늙은이로 변한 그가 약간 떨리는 손으로 내게 청구서를 내밀었다.

“실례합니다만, 70년대 초에 노스텐 스틸 회사에서 일 한 적이 있지요?”

그제야 그는 약간 놀라는 표정으로 얼굴색이 변했다.

“나...다-담배 한 갑을 사고 싶은....데....요.”

나는 오히려 동정을 하고픈 묘한 감정으로 사로잡혔다. 돈을 받지 않고 담배 한 갑을 그에게 그저 건넸다.

뜨거운 커피한잔을 뒤집어씌운 것으로 그날의 잘못한 대가를 이미 지불했고 담배 한 갑으로 6.25에 참전한 고마움의 내 작은 성의 표시도 한 셈이다. 정말 묘한 인과응보다.

71년 봄 길가에도 울타리에도 노란 개나리꽃들이 활짝 피었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고향 마을 과수원 울타리에 노란 꽃둥글로 친군감이 가는 꽃이다.

나는 도장에 출퇴근하는 것이 외출의 전부고 자동차가 없으니 거의 집안에만 갇혀 있었다.

고등학교 국어책에 “동물원 쇠창살 속에 갇혀서 골육이 쇠진해 가는 호랑이의 푸른 노스탈지어.....”를 연상했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 없고 이제는 고픈 배를 채우는 고기 덩이도 진저리가 났다.

그리운 고향 산천, 두고 온 부모 형제와 친구들 생각에 수많은 밤잠을 설쳤다.

따스한 봄빛이 창가에 스며드는 어느 날 오후 나는 향수에 젖어서 마시가 시작한 위스키 한 병을 혼자서 다 비우고 말았다.

“나는 돌아갈래! 행복이란 고픈 배를 채우는 것도 자가용을 타는 것도 아니야!”

마침내 나는 취한 걸음으로 인근 파출소를 찾았다. 서툰 영어로 “한국으로 되돌아갈래요. 비행기를 태워줘요. 강제 출국을 시켜줘요.” 라며 사정했다.

놀란 경찰관이 어디다 전화를 다더니 “당신은 지금 많이 취했소. 술이 깨고 난 후에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해 보시오.절대로 사고를 내면 안 되오.” 라며 몇 번을 당부해서 돌려보냈다.

어느 날 나는 조셉과 같이 40분을 운전하여 필라델피아 차이나타운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방 2블록 가량 되는 지역에 중국 가계와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었다. 오래 만에 나는 미국에 와 있는 것을 망각할 정도로 많은 동양인들을 만났다.

그 시기 변두리 백화점에 가면 어린 백인 꼬마가 시선은 내게 못 박은 채 몸뚱이는 엄마 손에 끌려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다. 나는 마치 동물원 철창 안에 든 기분이 들어서 볼일을 서두르고는 했다.
 중국 음식도 먹고 처음으로 마른 오징어와 일본 상표가 붙은 5온스짜리 김치 통조림도 몇 개 샀다.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좌석 밑으로 스며드는 눅눅해진 오징어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나는 햄 샌드위치 속에 김치를 넣어서 먹기도 했다. 반쯤 삶은 김치가 싱겁고 맛은 그렇고 그렇지만 얼마 만에 먹어보는 김치인가!

그리고 사온 오징어를 오븐에다 살짝 구웠는데 그 일은 상상을 초월한 냄새로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조셉과 어니는 코를 거머쥔 채 창문을 다 열어 제치고 집밖으로 도망쳤다.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구운 오징어 다리를 우물거리면서 “참새의 망향” 이야기를 떠올렸다.

> 다음호에 계속

곽병열 사범  dssim22@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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