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은 더위가 한풀 꺾이는 계절에 태권도 2단을 보유하고 본국으로 귀국했다.

969년 초겨울 나는 전역과 동시에 미군 태권도부 지도를 그만두고 이민 수속 때문에 수원에서 계속 머물렀다.

몇 번이나 비자문제로 서울을 오르내렸지만 미 대사관에서는 계속 이 핑계 저 핑계 트집을 잡았다. 미국에서는 조셉이 “왜 이유도 없이 일 년이 넘도록 비자 발급을 지연하느냐?”고 아우성이었다. 끝내는 조셉이 지역 국회위원에게 부탁하기에 이르렀고 나는 미 상원위원이 보냈다는 복사편지를 손에 쥐고 대사관을 찾게 되었다.

70년 10월 중순 이민 수속 시작 1년 반 만에 나는 미국 비자를 손에 쥐었다. 담배 몇 갑이면 6개월도 안 걸린다는데 사회생활에 아직 아둔한 내순진함의 보너스라나?

우리는 약 20분간 소형 단발기를 타고 서양화 화폭에서만 보았던 단풍이 곱게 물든 아름다운 들판 위를 날았다. 숲 사이로 띄엄띄엄 집들이 보였다. 정말 넓고 풍부한 자연을 가진 곳이었다. 도장 학생들이 잉글리시 빌리지 조셉 아파트에서 내 환영파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의 고된 이민 생활은 시작되었다.

나는 도장에서 가르치는 대가로 조셉과 어니가 사는 아파트에서 당분간 함께 기거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조셉이 누가 버린 침대를 주어 와서 내방에 놓았다. 군데군데 오물에 젖었던 자국이 지도를 그려놓은 매트리스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베개 혹시나 중환자가 쓰다 죽어나간 침대가 아닌지? 비오고 습한 날엔 욕지기가 났다.

유난히 추운 첫해 겨울눈이 무릎 위까지 하얗게 쌓였다. 감기 몸살을 앓고 온 몸에 열이 펄펄 났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밤새 앓았다. 마음이 허탈하니 몸이 더 움츠러들고 그에 비례해서 허약해 졌는지도 몰랐다. 아스피린 몇 알로는 듣지 않아서 아침에 근처 약국을 찾아갔다. 약국 문을 들어서긴 했지만 ‘몸살’이라는 영어를 몰라 어물어물 밖으로 도로 나왔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문 앞까지 가기는 했지만 자신이 없어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럴 때 김치 몇 쪽 넣고 팔팔 끓인 라면 국물에 국수는 먼저 건져먹고 쌀밥 몇 술 말아서 후루룩 마셨으면...

긴 여정인가 싶다.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시골에서 빈손으로 내말 쓰는 서울에 올라가도 버티기 쉽지 않을 터, 말도 관습도 다른 이국땅에서 하물며 타 인종들과 어울린다는 것이 그리 수월하겠는가.

나는 제일 먼저 그들에게 한국과 태권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르쳤다. 그리고 2차 대전 직후 일본 무술이 먼저 들어와서 “가라테”로만 통하는 이 사람들에게 “태권도”라는 새로운 단어를 성가시게 강조하며 사용케 했다.

간판도 “TAE KWON DO"라고 고쳐 부쳤더니 어떤 이들은 날보고 무모한 짓이라며 나무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용돈은 노스펜 스틸 회사에서 막노동으로 벌어서 썼다. 쇠파이프를 자르고 갈고 닦는 일을 했다. 안전안경을 쓰고 일은 하지만 쇳가루 불똥이 옷이나 살에 닿으면 까만 점으로 타버렸다. 손등에도 목에도 점점으로 물집이 생겼다. 어쩌다 쇳가루 하나가 옷 속으로 튀어들면 온몸으로 꽈배기 꼬기를 했다.

새벽 4시부터 정오 12시까지 8시간을 스틸 회사에서 일하고 곧바로 도장으로 나가면 밤 9시가 넘어서 하루 일과가 끝났다. 새벽 2,3시까지 어니와 조셉이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은 안면방해가 되었다. 입술이 부르트고 몸살은 낫다 말다 했다.

내가 스틸 회사에서 일한지 약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점심시간에 벨이 울린 후에도 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 하느라 좀 늦게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열 명 가량의 직원들이 나를 보자마자 낄낄 거리고 웃었다. 한국동란에 참전했다는 필립이라는 작업감독관이 뭐라고 또 지껄이기 시작했다. 피난 중에 여인들이 논밭 두렁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변을 보는 광경과 접대부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곽병열 사범  dssim22@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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