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 아저씨를 위한 이해- 왜 수련을 하나?

태권도의 성인 인구가 점점 줄어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태권도가 성인에게 힘들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태권도를 해보면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호흡이 가쁘다. 젊었을 때 한창 날렸던 사람도 도장에 와보니 옆에서 뛰는 청소년들과 자꾸 비교된다. 나이 탓에 망가지는 몸을 보며 절망하게 된다. 결국 골프나 치자며 체념하게 된다.

마흔 아홉 살의 빌 아저씨는 변호사다. 경력으로선 우리 도장 최고참이다. 내가 뭘 물으면 변호사답게 시원하고 알아듣기 쉽게 대답해 주었다. 배운 사람 티가 났다. 그런데 태권도 시간은 참 딱할 정도였다. 내가 본 재능 없는 사람 중에 으뜸이었다. 품새나 발차기는 돌다가 뭘 하는 줄을 까먹는다.

태극 품새를 4년 지나도록 다 못 외웠다. 몸까지 굳어 발차기나 동작이 정말 어정쩡했다. 후배들이 유단자가 되도록 빨간 띠 신세를 못 면하고 있었지만 무척 성실했다. 4년 만에 보는 승단 심사 일주일 전에 하다하다 더는 못하겠다고 주저앉아 버렸다.

평소엔 웃으며 한 번도 힘들단 내색 않던 분이었는데 승단 심사를 앞두고 자기는 안 된다고 절망하고 있었다. 내게 너무 미안하단다. 심각했다. 이제까지 열심히 인내를 가지고 왔는데 여기서 그만 두면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같이 앉아 얘기를 끌어갔다.

우리 육체엔 생명 에너지인 기(氣)가 흐른다. 육체의 기 흐름은 발끝에서 시작해서 머리끝으로 이동하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다.

갓난아이들의 기는 발에 몰려 있다. 그래서 자꾸 발을 바둥거리고 안 가르쳐도 일어선다. 그러다 걷게 되면 그 기운이 다리로 몰린다. 유아기 때는 다른 놀이가 필요 없다. 그저 뛰면 즐겁다. 어디든 뛰어 다니려 한다. 다리에 기운을 풀어주어야 살맛이 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청년기가 되면 기운이 올라 하초에 몰린다. 이성을 그리워하게 된다. 왕성한 생식기운이 뻗어 넘친다. 장년기가 되면 이 기운이 가슴으로 오른다. 무엇인가 가슴 벅찬 일에 인생을 걸고 싶어한다. 노년기에 이르면 기운이 머리로 떠 올라간다. 몸은 기운이 빠져 모든 것이 힘들다.

하지만 머리 속엔 온갖 추억과 망상으로 쉬지를 못한다. 잠은 줄어들고 생각은 끊임없이 돌아간다. 마침내 그 기운이 백회혈(百會穴:머리끝 정수리에 있는 중요 혈 가운데 하나)을 통해 빠져나가면 몸은 폐기 처분되고 마는 것이다.

호흡은 단전부터 코끝까지가 일생이다. 갓난아이들은 단전호흡을 자연스레 한다. 호흡이 잔잔하고 깊다. 여리고 약한 것 같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그 역동하는 생명력이 놀랍다.

나이가 들어가며 그 호흡이 점점 위로 떠서 복식이 되고 나이가 더 들면 흉식으로 변해간다. 아이들은 아무리 뛰어도 괜찮은데 어른들은 금방 숨이 차고 힘들다. 더 나이가 들거나 신체가 병약한 상태가 되면 호흡이 어깨로 오른다. 숨을 쉴 때마다 어깨가 들썩인다. 더 나이가 들면 숨이 턱에 찬다. 호흡이 그만큼 올라갔기 때문이다. 헐떡이던 숨이 코에 이르면 일생은 끝이 난다.

그러니 빌 아저씨 자신은 어디쯤인가 생각해 보라고 했다. 아마 장년기쯤일 것이다. 다리에 당연히 힘이 빠진다. 이것은 자연의 순리이니 청년들처럼 발차기 못한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찬찬히 조금씩 부지런히 해 나가다보면 훨씬 나아지고 활력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호흡 또한 가쁠 것이다. 호흡이 떠 있기 때문이다. 호흡이 흐트러지면 천하장사도 맥을 못 추는 법이다. 그러니 호흡을 깊고 찬찬히 자꾸 단전으로 끌어내려야 건강하고 활기차고 젊게 살 수 있다. 숨이 턱에 차도록 하지 말고 본인의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만 따라 하시면 된다고 했다.

또 육체가 내는 힘은 척추로부터 온다. 이 척추를 바르게 오래 보존하기 위해선 하체의 단련이 필수이다. 즉, 척추를 잘 보존하고 하체로 기운을 내리기 위해 하는 것이 발차기이지 송판이나 깨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힘이 빠진 다리에 기운을 다시 돌려보내고 자꾸 위로 뜨려는 호흡을 내려 젊게 살자는 것이 태권도 수련이다. 그에 더하여 건강한 척추를 잘 보존하는 것이 빌 아저씨가 해야 할 태권도 수련이지 청소년들처럼 그저 뛰고 부수고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에 따라 꾸준히 훈련을 해 온 것이 빌 아저씨의 장점이다. 아직 한 주 남았으니 나와 같이 다시 해 보자며 일으켜 세웠다. 빌 아저씨가 고맙다며 다시 연습을 했다. 덕분에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당당하

게 블랙벨트가 되었다. 기술로서는 열등생이지만 노력만큼은 우등생이었다.

성인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설명해 주면 다들 금방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좋아했다.

태권도는 나를 단련하고 가꾸어 가는 수련이다. 진정한 호신술은 세월 속에 녹슬지 않는 자신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성인들이야말로 태권도 수련이 필요한 존재들임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 지도자의 소양 - 삶으로 보여주는 지도자 

노스캐롤라이나에 형님 같은 관장님이 계신다. 세칭 성공하신 사범님이시다. 그 분은 말과 행동이 같았다. 삶이 바로 모범이 된다. 이건 정말 쉬운 경지가 아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다 보니 도장 이웃 건물 주차장에 차에 밟혀 터진 음료수 컵이 말라붙어 있었다. 끈적거리고 무척 더러웠다. 멀찍이 걸어가서 주우시더니 쓰레기통까지 찾아가서 버리고 오셨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이야기를 나누시며 다시 걸으셨다.

내가 그분을 뵙고 놀란 것은 이런 사소한 것이었다. 이웃 건물의 쓰레기까지 지나다가 보고 치워 주시다니? 어쩌다 방문한 내가 볼 정도니 평소 이런 행동을 이웃들이 못 볼 리가 없을 것이다. 그 분은 노스캐롤라이나 수도인 랠리에서 지역사회를 위한 많은 공로가 인정돼 시에서 그 분의 날을 정식으로 공포할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태권도로는 대선배격이신데도 나를 대하실 땐 그저 동생같이 친절하게 대해주실 뿐 권위주의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시자마자 도장에 출근 하셔서 밤늦게 귀가하신다. 관원이 2천명에 육박하는 도장들을 경영하시고 계시지만 내가 처음 뵈러 갔을 땐 볼 품 없는 소형 트럭을 타고 나타나셨다. 검소한 생활과 겸손이 몸에 배신 것이다.

아 이런 것이 성공하신 사범님들과 나와의 차이구나 싶었다. 성공하고 싶으면 말뿐만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야겠다 싶었다. 이런 분들에게 부담스럽게 회자되는 경제적인 성공은 성실한 노력이 일구어 낸 부산물일 뿐이었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규 사범  dssim22@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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