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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최홍희를 다시 말한다 (3)
1959년 동남아 순회 국군태권도시범단 인솔
시범단장직 놓고 갈등 빚자 손덕성 ‘최홍희 명예4단 취소’
  • 서성원 기자
  • 승인 2007.01.08 11:05
  • 호수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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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희는 1955년 4월 11일, 명칭제정위원회에서 ‘태권도’를 통과시키고,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냈다고 주장한다.

1959년 동남아 순회 시범 당시 국군태권도 시범단 조직표. 단장은 최홍희 육군 소장이었다.

그는 당시의 감회를 이렇게 말한다. <최홍희 著 「태권도와 나」참조>

“이 대통령의 휘호가 발표됨으로써 태권도는 누구의 모략도 받을 수 없이 공식 명칭으로 떳떳이 사용되었다. 나는 태권도를 창시하기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과 술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했을까? 이런 주장에 대해 이경명(現 태권도문화연구소 대표)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2002년 출간한 「태권도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 태권도의 어제와 오늘」(어문각) ‘태권도 공식 명칭’ 편을 보면 최홍희의 주장과 논리를 비판하는 장문(長文)이 잘 서술되어 있다.

어쨌든 최홍희는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가 떨어지자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휘하에 있는 오도관과 청도관에 걸려있는 당수도 간판을 태권도로 바꿔 버렸다. 또 부관 남태희에게 지시해 태권도를 수련하는 장병들이 경례를 할 때는 반드시 ‘태권’을 외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최홍희에게 호기(好機)가 찾아왔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월남의 고딘 디엠 대통령이 제29사단의 태권도 시범을 보고 매료돼 태권도 시범단의 월남 파견을 간청했다.

이렇게 해서 국방부의 주도로 국군태권도시범단이 구성됐고, 인솔 책임자로 최홍희가 임명됐다. 최홍희는 공군본부에 가서 비행기를 교섭하는 한편 시범단원과 합동훈련을 계획했으나 시범단원 선발 과정에서 민간도장과 반목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군태권도시범단은 △단장=최홍희 △지휘=남태희 △단원=고재천 백준기 우종림 곽근식 한차교 김복남 김근택 차수용 윤종걸 김만호 이응삼 이회석 김재룡 등 21명으로 구성했다. 당시 시범단 일원이었던 우종림은 1959년 3월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괴성의 공군 수송기를 타고 역사적인 길에 올랐다고 증언했다. 최홍희는 시범단 파견을 “민족의 장거(長擧)요 쾌사(快事)”라며 기뻐했다.

여기서 최홍희와 손덕성의 갈등과 반목을 짚어보자.

1950년대 말, 손덕성은 청도관을 창설한 이원국의 수석 제자로 청도관 2대 관장을 맡았고, 최홍희는 오도관을 창설해 군(軍)에 기반이 있었을 뿐 민간도장인 청도관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특히 최홍희는 일본 유학시절 가라테를 잠시 수련했을 지는 몰라도 태권도와 관련된 공인 단증이 없었다. 이것은 태권도계의 전면에 나서려는 최홍희에겐 큰 약점이었다.

이것을 간파한 부관 남태희는 국군태권도시범단에 손덕성이 참가하는 것을 주선하면서, 그 대가로 최홍희에게 명예 4단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손덕성은 최홍희에게 명예 4단을 주고 청도관 명예관장직까지 맡아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손덕성과 최홍희는 사이가 좋아졌으나 국군태권도시범단을 파견할 때 손덕성이 민간도장 관장으로서 단장을 맡겨달라는 부탁을 최홍희가 거절하면서 반목과 질시가 싹트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손덕성은 화가 치밀어 1959년 6월 15일, <서울신문>에 최홍희의 명예4단을 취소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 다음호에 계속 

서성원 기자  wtkd@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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